▪︎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성서를 진지하게, 그러나 문자적이 아닌........

바트 어만(Bart D. Ehrman)의 Jesus Interrupted

Narin Pusil 2021. 3. 28. 10:54

예수 왜곡의 역사

Jesus Interrupted / Bart D. Ehrman

 

A. 십자가에 대한 오해

 

1.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The Cross)라는 단어는 아이러니 하게도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헬라어 성서에는 십자가(cross)로 번역된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 헬라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데

헬라어 스타우로스 (σταυρος)는 나무 기둥, 말뚝이라는 의미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헬라어

스타우로스 (σταυρος)는 '서 있는 나무기둥'이라는 뜻이다. 헬라어나 라틴어 그리고 이를 계승한

영어에서 ‘st’는 ‘서다’ 라는 접두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stop, stand, staff, stay 등 그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2. 이처럼, 헬라어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에는 원래 '십자가'라는 의미는 없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역 같은 라틴어 성경에서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를 '크룩스(crux, 라틴

어)'로 번역하는 바람에 영어권에서 이를 'cross'로 받아들여 '십자가'라는 용어가 생겨 난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라틴어 ‘크룩스(crux)’에도 원래 ‘십자가(cross)’라는 의미가 없다. 라틴어 ‘cru’

는 ‘고통’과 ‘피흘림’을 뜻하는 접두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크룩스(crux)’는 ‘크루키오(crucio)’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크루키오’는 ‘고통을 주다’라는뜻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크루기오(crucio)’ 역시 문자적인 뜻으로 볼 때 십자가

와는 거리가멀다. ‘크룩스(crux)’는 고통을 주는 도구(오히려 곧은 장대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라는의미일 뿐인 데 글자가 비슷해서 영어권에서 ‘크로스(cross)’라고 이해하고 번역을 한 것이다.

 

3.  헬라어 성서를 보면 성서 어디에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베드로

사도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크술론(ξυλον)' 즉 나무에 달려 죽었다고 나온다(행 5:30).

복음서에도 예수는 자신이 처형당할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 나무 기둥)를 지고 갔고 도중에 구레

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처형도구는 예수와 구레네 사람이 지고간 그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 나무기둥)밖에 없다. 예수가 지고 간 것은 횡목이고 골고다 언덕에는 종목

이 세워져 있었다는 가정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선입견에서 기인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1) 헬라어 성서에는 십자가(the cross)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2) 대신 헬라어 성서에 십자가에 해당되는 단어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 나무기둥)’가 나온다.

...3) 헬라어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는 라틴어 성서 벌게이트 역에서 ‘크룩스(crux)’로 번역된다.

      크룩스(crux)에도 십자가(cross)라는 의미는 없다. 오히려 ‘고통을 주는 도구- 곧은 장대’라는

      의미로 쓰였다.

 

4. 원래 십자가는 고대로부터 인도와 중국 페르시아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에서 주술적으로 사용

되던 형상이다. 특히 바벨로니아에서 섬기던 태양신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시저와 아우구스투

스의 주화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박카스 신은

머리에 무수한 십자가가 새겨진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열렬한 태양신 숭배자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전쟁을 나가기 전에 꿈에서 보았다는 십자가 형상은 태양신의 상징일 가능성이 많다.

 

5. 예수는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즉 나무기둥에 달려 처형당했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예수가 달려 죽은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를 어떤 모양으로도 형상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Ιησου(예수) Χριστο(그리스도) Θεου(하나님) Υιο(아들) Σωτηρ (구

원자)”를 줄여 만든 ‘IXΘYΣ(익투스)’ 물고기 모양이 초대교회의 상징이었다. 스타우로스(σταυρος)를

건물에 달아 형상화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사형수의 목을 두른 끔직한 밧줄을 내거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Bart Denton Ehrman (/ bɑːrt ˈɜːrmən /, 1955 년 10 월 5 일 출생)은 신약 성서, 역사적 예수, 초기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텍스트 비평에 초점을 맞춘 미국 신약 학자입니다. 그는 3 권의 대학 교과서를 포함하여 30 권의 책을 집필하고 편집했습니다. 그는 또한 6 개의 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를 저술했습니다. 현재 그는 채플 힐에있는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의  제임스 A. 그레이 종교 연구소 저명 교수입니다.

 

 

B. 기독교 메시아

 

 

1. 예수를 메시아라 부르는 건 많은 기독교인에게 너무도 당연히 여겨지지만,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

아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히브리어에서 ‘메시아(ַ חי ש ָמ) -

마시아흐’라는 단어는 헬라어(그리스어)에서 ‘그리스도(Χριστο, Christ)’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

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라는 것은 ‘예수는 메시아’라는 의미이다.

 

2.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메시아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끊임없이 반복해서 예언했

고, 예수가 그런 예언을 완성했다고 여긴다.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

렘에 들어갈 것이며, 자기 백성에게 배척 받을 것이고, 사형선고를 받아 끔찍한 죽임을 당할

것이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거라는 예언이 있었다. 예수는 그런 예언을 모두 이루어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말한 예언을 예수가 모두 이루어 냈으므로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가 메시

아인게 확실하다고 믿는다.

 

   .... 그런데 왜 유대인은 그렇게 믿지 않을까?

   .... 왜 유대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 그들은 너무 완고한 것은 아닐까?

   .... 아니면 그들은 성서를 믿지 않는 무식한 자들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3.  유대인이 기대하는 메시아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의 관점

   왜 유대인은 예수가 그들의 성서에서 예언된 사람,

   즉 그들을 대신해서 고통받고 구원을 안겨주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구세주라는 것을 집요하게 거부할까?

   그것은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대인의 전통에는 고통받는 메시아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1) 그러나 성서에서는 고통받는 메시아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할 수도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처음 시작부터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성서의 몇몇 구절만을 유난히 강조하며

       교회에서 퍼뜨렸다. 이사야 53 장과 시편 22 편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끔찍하

       게 때로는 일부러 고통받는 다는 구절이 미래의 고통받는 메시아를 예언한 거라고 주장했다. 기독

       교인은 메시아가 그런 모습일 거라고 주장했지만, 유대인은 그런 예수를 메시아라 믿지 않는다.

 

   2) 그리고 아주 설득력 있게 반박한다. 바로 그 구절들에서 ‘메시아(ַ חי ש ָמ)’란 단어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한번 이사야 53 장과 시편 22 절을 직접 읽어보라. 실제 그곳에서 ‘메시아(ַ חי ש ָמ)’ 란

       단어가 등장하는지 확인해보라. 유대인의 전통에서 그 구절들은 메시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무수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그리고 ‘메시아(ַ חי ש ָמ)’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정확한 표현과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3)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탄생되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 대신 고통받다 죽지만 다시살아나는

      메시아를 기대한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예수 시대에 쓰여진 유대인 문헌에 따르면, 메시아의 모습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의견중 어떤 것도 예수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메시아(ַ חי ש ָמ)’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제사장, 왕에게 ‘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선택해서 하나님의 일을 맡겼다는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했다(삼상 10:1, 레 4:3,5).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전통적이고 공통적인

      생각은 고대 이스라엘의 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전승과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다윗왕에게 그의 후손이 항상 이스라엘

      옥좌에 앉게 될 것라고 약속했다(삼하 7:14-16,).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다윗의 후손이 400 년 동안 통치하던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 년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로 다윗의 후손은 왕위에 앉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이 언제까지나

      왕위에 있을 거라고 약속한 바 있다.

        (이것에 대한 구약성서의 예언,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서해석학에서는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에서 이루어 질 수 있을까?)

 

    4) 유대인은 하나님이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린 벌을 끝내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다시

        세워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만드는 식으로 약속을 실천할 거라고 믿었다. 새로이 기름부음을 받는

        왕이 메시아일 것이고, 그 왕은 다윗처럼 용맹하여 적들을 물리치고 다시금 이스라엘을 독립국가

        세울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희망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하기를 반복했다.

 

    5) 바빌로니아가 물러나자 페르시아가 몰려왔고(성서 이사야서에서는 페르시아왕 고레스 ’Cyrus

        the Great’를 ‘나의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후로는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로마가 차례로 이스라엘 땅을 유린하고 지배했다. 다윗의 후손은 이 때 이후로 예수 시대까지

       왕위에 앉지 못했다.

 

    6) 하지만 예수의 시대에는 미래의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는 유대인은 많지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의 삶에 익숙해진 정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는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시편 2 편 1-9 절을 보면 메시야를 염원하는 구절들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 부은 자(메시아(ַ חי ש ָמ))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이 사슬을 끊어버리자!" "이 멍에를 벗어버리자!" 한다마는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려 호통치시고 노기 띤 음성으로 호령하신다.

        "나의 거룩한 시온 산 위에 나의 왕을 내 손으로 세웠노라."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7) 다윗의 후손 중에서 위대하고 강력한 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물씬 풍겨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왕은 다윗의 후계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할 것이다(삼하 7:14). 미래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이 예수시대에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한 증거는 예수시대가 태어나기 전

   몇 십년 전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솔로몬의 시편’이란 책을 보면 분명하게 강조되어 등장한다.

 

        “주님, 그들을 위해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세워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당신에게 알려진

         시대에 다스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에게 불의한 지배자들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짓밟아

         파괴시키려는 이방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낼 힘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물려받은 곳에서

         죄인을 쫓아내고, 죄인의 교만함을 토기장이의 항아리처럼 깨부수며, 철막대로 그들의 모든

         재산을 부셔버리고, 무법의 민족들을 그의 말로 멸망시키는 지혜와 정의를 그에게 주시옵소서.

         그는 이방 민족들에게 멍에를 씌어 그를 섬기게 할 것이며, 온 땅을 굽어보는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깨끗이 하여 처음처럼 성스러운 곳으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또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들을 다스리는 정의로운 왕이 될 것입니다. 그의

         시대에는 백성들 사이에 불의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성스럽고 그들의 왕이

         메시아(ַ חי ש ָמ)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시편 17:21-32)

 

8) 이처럼 예수의 시대에 많은 유대인은 메시아가 전사처럼 강력한 왕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이스라엘을 구해낼 미래의 구원자를 다른 모습으로 생각한 유대인도 있었다. 특히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믿었던 종말론적 전통에 따라, 찾아올 구세주가 단순히 이 땅의 왕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가끔 존재하기도 했다. 미래의 구세주는 이 땅에서 악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하나님이

    보낸 우주의 심판자일 거라고 믿었다. 그 신적인 존재는 ‘인자’(다니엘 7:13-14)를 비롯해,

    문헌에 따라 다양하게 불렀다. 기독교가 시작된 때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두유대문헌을보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하나님의 백성)은 한없이 기뻐했다. 기쁜 마음으로 찬송하고 찬미했다. 인자의 이름이

       그들에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인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았고, 모든 심판권이 인자에게

       주어졌다. 인자로 인해 죄인들은 죽어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인자로 인해 죄인들은 죽어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세상을 타락시킨 사람들은 사슬에 감겨 멸망의 감옥에 갇혀 죽어갈

       것이고, 그들이 저지른 일들은 이 땅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 때부터 이 땅에는 타락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인자가 나타나 영광의 보좌에 앉았기 때문이다. 사악한 모든 것이 인자

       앞에서는 죽어 사라질 것이다.” (에녹일서 69 절)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바람의 힘에 사람의 형상과 같은 것이 바다 한가운데서에서 올라왔다.

       그 사람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날아다녔다. 그가 얼굴을 돌리는 곳마다. 그의 눈빛에 모든 것이

       부르르 떨었다. 그 후, 바다에서 올라온 사람과 싸우려고 하늘의 사방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내려와 한데 모였다. 그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도 그는 손을 들지

       않았고 창을 쥐지도 않았다. 어떤 전쟁 무기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입에서 불기둥

       같은 것을 뿜어냈다. 그가 입술 사이로 토해낸 새빨간 불길이,……… 맹렬히 달려와 싸우려던

       사람들을 쓰러뜨렸고 그들 모두를 불태워 버렸다. 그 많던 사람이 순식간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잿더미와 연기 냄새만 남았다.” (에스라 4 서 13:1-11)

 

9) 위의 솔로몬의 시편과 에녹서는 외경, 에스라 4 서는 위경으로 모두 공동번역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전사처럼 강하고 위대한 왕, 또는 그보다 훨씬 강력한 우주의 심판자야 말로,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아(ַ חי ש ָמ)’의 모습이었다. 간혹 미래의 구세주가 다른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는 유대

    인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의 생각에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바로 미래의 ‘메시아(ַ חי ש ָמ)’는 위풍당당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인물이어서 하나님의 적을 섬멸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민족을 엄하게 다스릴 것이란 생각이었다.

 

 

 

4. 그런데 실제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시골 벽촌 출신에 이름도 거의 알려지지않은 떠돌이 설교자였다. 게다가 율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정치적 폭도라는 죄목으로 ‘나무기둥-스타우로스(σταυρος)’에 못박혀 죽은 인물이었다.

예수는 로마군을 쫓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로마군이 그를 짓눌러 죽였다. 예수를 메시아로 부른다는 것은

대부분 유대인에게 어불성설이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었다. 예수가 ‘메시아(ַ חי ש ָמ)’라고?

나무기둥에 못박혀 죽은 설교자가 메시아 라고? 유대인들에게는 포복절도할 일이었다.

 

 

 

5. 기독교인이 메시아를 믿는 이유

 

 

1) 유대인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받고 죽은 메시아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왜 기독교인은 고통받는 메시아를 믿었을까?

 

       (예루살렘의 헤롯성전의 야훼 지성소가 티투스의 로마8군단에 파괴되도

          제우스의 번개를 가진 야훼가 벼락을 쳐서 로마군 모두를 아니 하나라도 살해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모습을 올리브산에서 바라보던 유대인들은 절실함에서 나온 야훼신에 절망했고,  

            그때를 계기로 소위 복음서 라는 새로운 작가(예언)적 상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 JK )

 

2) 사실 고통받는 메시아를 향한 믿음은 기독교에서 절대적인 중심축이다. 그 이유를 역사적으로 추적해볼 수 있다.

    예수가 죽기 전부터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추종자들이 있었다. 이런 확신은 복음서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는 메시아다!” 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면, 예수가 독립국가를 세우고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왕이 될 거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예수 자신은 ’메시아’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즉 종말론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을 성서는 보여준다.

 

3) 당시 예수가 메시아일 거라는 추종자들의 바람은 완전히 부인됐다. 예수는 군대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로마군을 약속의 땅에서 몰아내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무기둥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었다. 따라서 예수를 향한 추종자들의 믿음이 헛된 것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4) 그러나 그를 따르는 자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에서 되살려냈다고 믿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자,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자였고, 구세주였다. 예수는 메시아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초기 기독교인은 메시아를

   새로운 방향에서 이해하게 되었으며, 초기 기독교인들의 논리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예수는 메시아이며, 고통받으며 죽어갔다. 따라서 메시아는 고통받고 죽어야 했다.

 

 

 5)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고통받는 메시아를 향한 믿음은 기독교에서 절대적인 중심축이다. 그런데

     문제는 메시아가 고통받다 죽을 거라는 예언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기 기독교

     인은 새로운 믿음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아 구약성서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구절에서 근거를 찾아냈다. 그 구절들에서 메시아는 전혀 언급되고있지

     않지만, 전에는 누구도 그 구절들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초기 기독교는

    그것들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6) 원래 이사야 53 장 3-6 절과 시편 22 장 1-18 절은 미래의 메시아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구절들

     이었다. 예수 당시를 포함 예수 이전 유대인들은 누구도 위 구절을 메시아와 관련지어 해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라 믿은 순간부터 이런 구절들에서

     메시아가 겪어야 할 고난을 찾아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거기서 태어나게 되는 과정이

     사뭇 다르다. 왜 기독교인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길 바랬을까?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올 거라고 구약성서가 말했기 때문이다(미가 5:2).

 

  7) 그러나 당시 예수가 나사렛에서 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랬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예수가 나사렛에서 자랐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어야 한다. 그래야 예언이 완성된다. 그랬기 때문에 두 복음서는

      무리하게 예수를 다윗에게 접붙이고, 그의 메시아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예수를 메시아로 만들기 위해 후대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기록자는 예수의 탄생을

      각색한다. 문제는 두 복음의 설명이 모순되는 데 있다. 이런 모순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를 고통받는 메시아라 믿은 초기 기독교인이 예수가 성서의 예언을 완성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시각에서 예수를 이야기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