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성서를 진지하게, 그러나 문자적이 아닌........

다시 읽는 성서 : 마커스 J. 보그(Marcus J. Borg) -2

Narin Pusil 2021. 3. 21. 18:38

인쇄술과 신학의 발전                                               

 

 성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신약성서 기록당시 물리적 사실들 우선  당시에는  종이(paper)가  없었다.  

 

1. 최초의  바울서신이라  불리우는  데살로니가 -전후서(AD 50~51 경)나  최초의  복음서라  불리우는  마가복음(AD  65~70 년경)  시대에는  종이에  해당되는 것이 두가지 밖에 없었다. 하나는 양피지(parchment)라는 것인데 양가죽을 무두질하여 늘려서, 얇은 가죽으로 야들야들하게 만든 것이다. 양가죽만 쓰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염소나 소가죽도 사용하기도 했다. 소가죽은 더 길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새끼 가죽은 더 좋은 양질의 고급품이 나올 수 있었다.  새끼 가죽에서 나오는 양질의 고급품을 벨룸(vellum)이라고 불렀다. 이 양피지는 우리나라 족자처럼 양쪽에 나무를 껴서 둥글게 말게 되어 있다. 이 양피지는 한 두루마리, 즉 한권의 의미를 지니는 볼륨(volum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 볼륨은 한 롤(roll) 이라는 뜻이다.

 

2.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파피루스(papyrus)라는  소재가  있다.  이것은  나일강  델타지역에서  잘 자라는 키페르스 파피루스(Cyperus Papyrus)라는 4.6m 까지 자라는 풀의 줄기를 스트립으로 쪼개서 합하여 눌러 말려서 얇고 부드러운 표면을 형성시키는 데 이것은 양피지처럼 둥글게 말수 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책모양으로 바인딩 하는데 그것을 코텍스(codex)라고 부른다. 이 코덱스는 양피지와는 달리 앞뒤 면을 다 사용할 수 있었고 요즘 볼 수 있는 가죽성서 처럼 껍데기는 가죽으로 포장해서 사용했다. 지금 우리는 성서를 “바이블(Bible)”로 부르는데 이 용어의 고어는 “비블로스(byblos)이다. 그런  데 이 “비블로스”는 사실 “파피루스”의 순화된 발음(P--→B)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블로스” 는 “파피루스”를  수출한  페니키아의  도시이름이기도  하다(현재  레바논  베이루트  북쪽의  주바일 Jubayl 지역). 이 도시 이름에서 “바이블”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이 양피지나 파피루스는 그 당시 비싸고 구하기  힘든 재료였다. 이  양피지나  파피루스 위에 동, 식물 또는 광물에서 추출한 염료에 수액을 섞어서 고대 잉크를 만들어 갈대펜으로 찍어서 글자를 기록했다. 유대인들은 파피루스보다 양피지를 더 즐겨 사용했다. (파피루스는 비용이 엄청나서,  King이외는 지니고 있기 힘들었다) 양피지의 원어인 파치 먼트(parchment)는 에베소 위에 있는 페르가뭄(Pergamum, 현재 버가모)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 에서 양피지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필사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오류들 
 

 

3. 고대의 문서들은 현대처럼 대량 인쇄되어 유통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꺼번에 여러권이 필사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각의 필사본들이 완전히 똑같은 본문을 가질 수는 없었다. 손으로 베끼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본문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겼다. 심지어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노예들이 기계적으로 필사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오류와 변개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과정이었다.  

 

4. 어떤 때는 우연히, 또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변경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연한 변개는 글자를 잘못 베끼는  실수나  부주의로  본문이  변개되는  경우이다.  반면에  고의적으로  변개되는  경우는 필사자가  자신이  베끼는 대본의  본문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현대  발견된 사본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같은 본문을 가진 여러 사본들이 단순히 글자나, 단어의 변개를 넘어 의도적으로 문장을 수정하거나 없애고자 한 흔적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의 저술가들은 이러한 예를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작품가운데 분노의 문제를 다룬 유명한 글이 있다. 여기서 그는 두가지 종류의 분노, 즉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분노와 우리에게 전혀 해롭지 않은 분노를 구분하고 그 차이점을 지적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분노에 속한 것들을 설명하면서 그는 “글씨가  너무  작아서  집어  던지고  싶은  사본들이나  오류가  지나치게  많아  찢어버리고  싶은 사본들”을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류가  많은  문서들을  읽으면  얼마나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지, 당시 필사자들의 오류가 얼마나 빈번한지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5. 주후  1세기 살았던 로마의 풍자시인 마르셔얼(Martial)의 예도 고대 사본들의 오류가 얼마나 빈번하고 심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독자들이여 !  여기 실린 내 시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라틴어 표현이 썩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오. 그대가 읽는 그 책을 베낀 필사자가 필사 작업을 급히 끝내느라, 여기 내시를 훼손한 것이라오. 하지만 만일 그 필사자가 아닌 내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대의 이해력을 탓할 수밖에 없소. 그대는 ‘하지만 보시오. 이 표현은 별로 좋지 않군요’ 라고 말하겠지. 마치 내가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오. 어떤 것들은 표현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하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본문을 베끼다 보면 으레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 문제는 고대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인정되 고 보편화된 일이었다.  초기 3 세기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리겐(Origen) 역시 그가 가지고 있던 복음서 사본들에 대해 다움과 같은 불평을 늘어 놓았다. 
 

 

  “사본들이 지나치게 많은 차이가 난다.

 

6. 이것은 일부 필사자들의 부주의와 일부 필사자들의 그릇된 뻔뻔함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베낀 것을 한번 더 검토하는데 소홀하거나, 아니면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말을 덧붙이거나 삭제해 버렸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는  고대사회의  물리적  한계속에서  필사자들의 오류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사회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 사본의 절반은 2~4 세 기 이후의 단편 사본만 가지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훨씬 후대의 것들이다. 오리지널 원본은 없다.  고대 성서는 시각적 문헌이 아니라 청각적 문헌이었다.

 

7. 우리가  또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정경으로  인정받은  고대  문서는  시각적 문헌이 아니라 청각적 문헌이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독서를 위하여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 이다.  이  당시  종이에  해당되는  양피지나  파피루스는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재료여서  당연히 공간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매우 작은 글씨로 띄어쓰기 없이 기록되었다(최초 장, 절의 구분은 1200 년 경 영국의 캔터베리 주교 랭튼(Stephen Langton)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시각적으로 불편했을 뿐 아니라 절대 일반인의 독서를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지역 공동체에 낭독되어지는 용도로 기록된 것이다.

 

8.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데살로니가전서 5:27-28).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로새서 4:16)

 

9.  2 세기 중반 기독교 지식인이자 변증가인 순교자 저스틴(Justin)의 글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글을 보면 그의 고향 도시인 로마교회에서 어떻게 예배가 진행됐는지 엿볼 수 있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이고, 시간이 허락되 는 만큼 사도들의 회고록들이나 선지자들의 글들을 낭독한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사회자가 이 선한 일들을 본받을 것을 구두로 교훈하고 권면한다.” (제 1 변증서, I Apol, 67)   초대교회 공동체의 실제 정황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냥 편지 하나를 보냈다는 사건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고대사회의 문맹률을 볼 때, 그 편지는 보통의 성도들은 읽을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이 공동체의 회중들이 모여 있는 공적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읽는 것이다. 이 낭독(public reading)은 초기교회 공동체 의 가장 보편적인 문화였다. 때로는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읽을 능력이 안되는 경우, 그 공동 체에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읽어야 했다.

 

10.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제자들은 대개  갈릴리 출신의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였다. 복음서를 보더라도 그들 대부분은 글을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었다. 그 둘 가운데 두사람,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에서 명백하게  “학문 없는”  사람들이라고  소개된다(행  4:13).  이 말은  글을 읽고 쓸줄 모르는 문맹이라는 뜻이다. 사도바울도 그가 고린도교인에게 보낸 편지속에서 고린도 교인들 대부분이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교육을 받아 문맹을 극복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다.  

 

11. 케릭스 편지의 낭송자를  전령이라고  하는데  이  전령은  그리스어  헤르메스(Hermes)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며, 성서시대에는 그 전령을 케릭스(keryx) 또는 히에로케릭스(hierokeryx)라고 불렀다. 케릭스는 고대 헬라시대부터 고상한 지위가 있었으며, 홀을 가지고 다녔고, 지혜와 총명의 상징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일종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이 케릭스들이 선포하는 내용이 바로 케리그마(설교)가 되는 것이다.   낭송문화속의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의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낭송문화였다. 예수의 말씀이라고 전승되어온 파편이나 다양한 목격담,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등이 케릭스에 의해 초기교회 공동체에 낭송되는 것이 그들의  예배였다.  

 

12. 낭송문화는  반드시  운이 들어가고  억양(intonation)의  리듬이  들어가고  때로는 노래가 삽입되기도 했다.  현대 이슬람의 예배, 기도회에서 이맘(예배 인도자)들의 운율이 있는 낭송과 비슷했을 것이다. 또는 한국의 판소리와도 흡사했을 수도 있다.    마가복음 낭송에 대한 마가복음 자체의 증거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있어서는 안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마르코 13:4)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읽는 현대의 사람들은 괄호 안에 있는 “읽는자는 깨달을 진저)” 이 말이 현재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읽는자”는 이 복음서를 대중에게 낭송하고 있는 낭독자이다.  이것은  마치  악보에  연주자에게  템포나  곡의  분위기를 지시하기 위해  라르고(느리고  폭넓게),  알레그로(빠르고  유쾌하게)같이  곡을  이해하기  위해 써놓은 싸인 같은 것이며 낭독되는 부분이 아니다.   

 

13. 초기 교회의 통일성 및 독특성(Unique)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께 모였을 때에 낭독자가 읽어 주었던 낭송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성도들 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  편지들과  복음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또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문서들이다.  이러한 문서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을  하나의  정신으로  묶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 편지들과 문서들은 로마제국  전역에 산재한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가 무엇이 다른지 명확히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순전히 편지와 복음 서들을 서로의 공동체에 돌려가며 낭독되어져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