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08 / 03
Reading the Bible again for the first time : Taking the Bible seriously but not literally
다시 읽는 성서
: 성서를 진지하게 그러나 문자적으로 읽는 방식이 아닌........
마커스 J. 보그(Marcus J. Borg)
들어가며
한국교회에서는 성서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에 따라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가 달라진다. 지난 학기에서 이미 연구하였듯이, 성서안에서 일치하지 않는 본문들이 제법 발견되는 것을 살펴보았다. 서구에서는 17 세기 계몽주의 이후 이러한 본문들에 대해 비평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서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대다수의 근본주의 교단과 교회에서는 문서비평이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고 신앙을 약화시키는 행위로 판단 하고 성서에 대한 비평과 학문적인 접근을 달가와 하지 않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성서안에 일치하지 않는 본문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성서내용의 불일치”라 할 수 있다.
1. 성서의 불일치 내용 창세기 1 장과 창세기 2 장 4 절 이하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이야기를 보면 서로 창조순서가 모순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도 다른 것으로 학자들은 인정한다(P 문서와 J 문서),
2. 창세기 6 장과 7 장에 등장하는 노아홍수의 기사도 두 번 반복되는데, 창세기 6 장 19 절 에는 모든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가지만, 7 장 2 절에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두 쌍씩, 공중의 새는 암수 일곱 쌍씩 방주에 들어가 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7 장에 등장하는 홍수기간도 불일치하고 있다. 창 7:17 에는 홍수가 땅에 사십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말하는데 반해 7 장 24 에는 물이 백 오십일을 땅에 넘쳤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홍수의 기원에 대해서도 7 장 4 절에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홍수를 일어났다고 하지만 7 장 11 절에서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내렸다고 표현한다.
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족보는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널리 알려 진 성서의 불일치 사례에 속한다. 또한 마태복음은 예수 탄생을 적어도 헤롯왕이 죽기(B.C 4 년) 전이라고 하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구레뇨 총독 때(A.D 6 년)에 태어난 것으로 적고 있다. 무려 10 년 가까이 시간차이가 나는 것이다.
4.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베들레 헴에서 이집트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사렛으로 가서 정착한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따르 면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나사렛 사람(눅 2:39)이었고, 잠시 베들레헴에 들려서 나사렛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마태복음이 기록하는 예수는 태어나자 마자 곧 이집트로 피난 가지만, 누가복음의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40 일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된다.
마태복음 27 장 9절에서 성서기자는 예언자 스가랴가 11 장 12 절에서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착각하고 있다. 공관복음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5. 공관복음서 안에는 같은 사건을 기록한 기자들이 서 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이것을 공관복음 문제라고 한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공관복음은 예수 께서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제삼시(오늘날의 오전 9 시) 라고 기록하고 있다(막 15:25). 그러나 요한복음 19:14 은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날이 유월절의 준비일(목요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고 기록한다.
6. 이외에도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은 실제로 예수의 '발'에 부은 것인가?(요한 12:1~8) 아니 면 예수의 '머리'에 부은 것인가?(마태 26:6~13, 마가 14:3~9). 이외에도 성서안에서의 불일치 본문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성서의 내적오류 성서 내용의 불일치뿐만 아니라 성서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내적오류 또한 지적된다.
7.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게 되면 창세기 1 장부터 발생하게 되는 설명하기 곤란한 질문들이 수없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 장 창조이야기에서 태양이 창조되기전 빛이 발생하고, 태양을 창조 하기 전에 낮과 밤 / 아침과 저녁을 구분하는 것은 창세기 저자의 문자적, 역사적 표현 보다는 문학적 또는 은유적 표현이 훨씬 정당성이 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창세기 4 장에 보면 동생을 죽인 가인이 에덴동산에서 쫒겨 날 때 가인은 “이 땅에서 자기를 만 나는 자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창 4:14).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와 그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만 있는 에덴동산 이야기에 뜬금없이 다른 인간들이 있어 범죄한 가인을 죽인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성도들에게 질문을 야기해 왔다.
8. 창세기 6 장-10 장의 노아의 방주만 보더라도 그런 배를 노아 혼자서 건축하기에 불가능할 뿐더러 설사 그런 방주를 지었다 할 지라도 그 공간(길이 135m, 넓이 22.5m, 높이 13.5m) 안에 지구상의 전체 동물을 암수 한쌍씩, 또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2 쌍, 7 쌍씩? 넣는 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성서에는 방주는 3 층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각기 동물들이 각 방을 사용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벽과 격벽, 기둥과 복도의 면적을 무시하고서도 각 3,105 제곱미터의 층이 3 개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성서의 내용대로 계산하면 절지류를 제외하고서라도 약 2 만종의 동물들이 9,315 제곱미터 면적의 내부에서 각기 0.46 제곱미터의 방에서 생활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말은 가로*세로 6.78cm 인 방에서 약 1 년을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규빗, 광이 오십규빗, 고가 삼십규빗이며”(창 6:15) 만약 어찌 어찌해서 그렇게 넣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 안에서 1 년동안 생존하기 위해 서는 생물은 대체로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4~ 5%의 해당하는 식량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방주에 태운 생물 무게의 14~15 배에 해당하는 식량을 추가로 적재했어야 하는데 방주 에는 실제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목선을 건축한다고 해도 목선으로 지탱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만든다 하더라도 바다에서는 파도, 바람, 폭풍우 속에서 뒤틀림과 항력, 인장력, 압축력이 배를 쥐어짜듯 가해지기에 거대 목선은 버틸 수가 없다. 방주의 구조는 바다에서 도저히 견딜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제 그 칫수 대로 미국에서는 노아의 방주를 켄터키 주에 건축하여 테마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의 목재 배는 바다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구조인 것을 현대인들은 인정할 뿐 아니라 그 방주안에 2 만종이 넘는 동물을 암수 한쌍씩, 정결한 짐승은 암수 2 쌍식 또는 7 쌍식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9. 성서에 관한 충돌과 갈등 성서안에서의 충돌은 현대에 와서 기독교안에서도 성서를 어떻게 읽고 대해야 할 것인 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과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대다수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들은 이것을 이미 알고 있어 왔다. 이러한 성서에 관한 충돌은 19 세기 유럽을 지나 오늘날 북아메리카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뜨거운 논쟁과 갈등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충돌은 성서를 읽는 두개의 서로 다른 방식에서 발생한다. 두가지 방식이란 크게 나누자면 그것은 성서를 “문자적-사실적(literal-factual)”으로 읽는 방식과 “역사적-은유적(historical-metaphorical)” 방식으로 읽는 것과의 차이점이다. 일반적으로 “문자적-사실적(literal-factual)”으로 읽는 방식은 근본주의자들과 다수의 보수주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취하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현대의 성서학자들과 서구의 주요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역사적-은유적(historical-metapho -rical)” 방식의 성서 읽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지난 몇 십년간 주요 교회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점차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10. 성서의 발생과 고대의 문자 일반적으로 최근까지 보통 사람들은 성서를 읽을 수 없었다. 약 오백년 전까지는, 성서는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 즉 라틴어, 그리스어, 혹은 히브리어를 알고 있거나, 제작비가 너무 비싸서 상대적으로 희귀한 사본들을 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만이 읽을 수 있었다. 실제 고대 인구의 약 3%의 인구만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의 문맹률을 연구한 윌리엄 해리스(콜럼비아 대학)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사회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았던 시기와 장소는 그리스 고전 문학이 꽃피웠던 주전 5 세기의 아테네였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고작 10~15%에 불과했다. 바꾸어 말하면 최상의 조건하에서 인구의 85~90% 가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시작된 후 주후 1 세기의 로마제국의 문맹률은 당연히 이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이것을 전체 세계 인구에 적용해보면 훨씬 심각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11. 그리고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와 중세사회는 미신이 일반 사람들에게 훨씬 많이 퍼져 있는 시기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은 미신이 얼마나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성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역사의 진 공상태에서 갑자기 불러주는 데로 받아 적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의 주장하는 성서의 “유기적 영감설”은 성서 기록자의 성격과 기질, 교육과 교양, 은사와 재능, 말씨, 문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등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배경을 전인적으로 사용하여 저자들의 상황속에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조류와 문화, 역사적상황등을 무시할 없다. 뿐만 아니라 성서 저자의 기록의도와 목적, 그 책들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저자 고유의 의도들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기록 당시의 시대적 문학양식이나, 표현양식, 문화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진공상태에서 기록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성서는 그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주변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환경과 유리되거나 동떨어진 상태에서 기록될 수 없는 것이다. 성서의 기록자들은 당시의 주변문화와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종교의 모든 상황들과 교차하면서 저자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12. 그러므로 성서를 읽을 때 단순히 문자적-역사적 접근법으로 해석하면 많은 난점들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서를 제대로 다시 보기 지난 세기 동안 성서를 읽어 왔던 낡은 방식은 안타깝지만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롭게 성서를 읽는 방식에 대해 고민 해야 한다. 읽기와 보기는 함께 간다. 우리가 읽는 것을 통해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가 읽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 모두는 안경을 쓰던 혹은 쓰지 않더라도 각자의 내면의 렌즈를 통해 성서를 읽는다. 이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렌즈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옛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게 있어서 당면한 문제는 성서의 진실이나 기독교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붙잡고 있는 전통이 나 교리 또는 어떤 이권들을 위해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 수도 있다.
13. 한국교회는 어떤 것 때문에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기를 계속 고집하고 있을까? 성서를 어떻게 보고 읽는가에 대한 충돌은 오늘날 북 아메리카의 기독교인들을 구분하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북미 기독교인들의 한쪽 편은 근본주의자들과 많은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다. 다른 한 편은 온건한 자유주의 기독교인으로, 많은 주요 교단들이 이에 속해 있다. 이들 두 그룹을 나누는 기준은 성서에 관한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을 대하는 서로 다른 방식에서 나온다:
성서, 그 기원에 대하여 / 성서, 그 권위에 대하여 / 그리고 성서 해석에 대한 질문이다.
첫 번째 그룹, 즉 자신 스스로를 “성서를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성서를 하나님의 무오하고 무류(無謬)한 말씀으로 본다. 이러한 확신은 그들이 성서의 기원을 보는 방식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다른 책들은 그렇지 않다. 신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이고, 그리고 그 신적 기원이 권위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 의하면, 비문자적 해석방식을 인정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를 해치게 하는 것이고 결국 그것은 문자적 해석을 원하지 않는 자들의 해석하는 방식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근본주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이 성서를 극도로 조심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며, 온건한 자유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의 효력을 약화시켜서 그 권위를 없애려 한다고 종종 비판한다.
두 번째 기독교 그룹 즉 성서를 문자주의로만 보지 않는 그룹은,
북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 주요 교회에 소속 되어있는데, 성서를 어떻게 보면 안 될 것인가 보다, 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해서 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서의 많은 부분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되고, 즉 역사적인 허구로 봐야 한다거나 아니면 성서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 기 위한 많은 은유와 문학적 장치들이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결론까지 다다르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고 문자주의적인 성서해석을 넘어 설득적이고 자명한 의미의 세계로 나아 가는 성서읽기 방법을 찾아간다. 성서를 읽는 방식 – 순수 문자주의와 의식적 문자주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기독교인(특별히 개신교인)들은 성서를 보고 읽는데 공통의 렌즈를 공유하여 왔다. 이렇게 성서를 보는 방법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이러한 렌즈를 끼고 성서를 보아왔는지 인식하지도 못하고 지내왔다. 성서를 보는 데 있어 이러한 방식을 “순수 문자주의(natural literalism)”로 부른다.
순수 문자주의의 상태에서는, 성서는 힘들이지 않고 문자적으로 읽히며 받아들여진다. 이 상태 에서는 누구라도 다르게 생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문제 를 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이 좋은 행위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순수 문자주의는 “의식적인 문자주의”와는 엄연하게 다르다. “의식적인 문자주의”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데 문제가 있음을 깨닫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적 읽 기를 고집하는 태도로 일종의 문자주의의 현대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순수 문자주의가 힘들지 않는데 반해, 의식적인 문자주의는 수고스럽다. 그것은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믿기 힘든 어떤 것을 믿어야만 하는 수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 문자주의는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 며, 그렇게 하는데 따로 “믿음”이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과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의식적인 문자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성서 를 보는 방식은 지난 세기의 순수 문자주의와의 상당 수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성서를 순수 문자주의라는 렌즈를 통해서 본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성서의 기원과 권위 그리고 해석에 관한 아래의 결론들을 따라가도록 이끄는데, 이 결론들이란 의식적인 문자 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1) 성서의 기원은 신적인 작품이다. 지난 2 천년동안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어떻게 불러왔는가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 성서는 성스러운 경전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며, 다른 어떤 책이 할 수 없던 방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2) 성서는 진실하며 신적인 권위가 있는 경전이다. 성서의 진리와 권위는 그 기원에서 비롯된다. 신적인 작품으로서, 진실하다는 신적 보증이 있으며,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로서 신중 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3) 성서는 역사적으로 사실적으로 진실하다. 순수 문자주의 상태에서, 성서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실제로 역사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예외가 있다면 명백하게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로, 예를 들면, “산들이 기뻐서 그 손으로 박수를 치며” 등과 같이 구분될 때다. 순수 문자주의자들도 은유를 인식하고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어느 시기 발생했던 어떤 사건에 대해 보고하는 것들이 성서에서 표현되면 그것은 실제 역사안에서 발 생한 것으로 인식한다. 우리들 보다 앞선 2, 3 세대 대부분은 순수 문자주의자들이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 성도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이러한 전통에 흠뻑 빠져 자라왔다. 우리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주일학교에서, 우리는 십계명을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성서에 있기 때문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예수 사랑하심은”을 불렀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성서에 써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이 그러듯이, 한국의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성서가 믿음과 도덕에 유일한 권위라고 생각한다. 비록 종교개혁 당시의 라틴어를 알지는 못했 지만,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 “오직 성경”은 종교 개혁의 슬로건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슬로건의 하나였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멜로디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우리는 성서의 권위를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다.
성서를 보는 이런 오랜 방식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오랜 방식과 병행한다. 연결점이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성서는 시대를 거쳐 기독교의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성서를 어떻게 보는가와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이해는 전통적인 기독교로 이는 지난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본주의 자들과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가진 생각이 바로 그러하다. 나는 이를 여섯 개의 형용사를 써서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다.
첫째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를 보는데 이런 오랜 방식이란 문자에 집착하는 것이다(형식에 있어 엄밀하건 부드럽건 간에).
둘째로, 교리적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 내용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를 정기적으로 활용하는 교회에서, 만약 당신이 손가락을 가리키지도 않고 어떤 부분에서 침묵하지 않고도 사도신경을 외울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기독교를 보는 옛 방식은 가부장적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을 지칭하는데 현저히 남성언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그리고 가족에서조차 남성 중심적 계층을 합법화 했다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은 배타적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 배타주의는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단언에 불편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입장을 거부한다면 비기독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지지하는 좀 더 부드러운 형태도 있기는 있다.
다섯째로, 너무 도덕주의적이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로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이것은 (정의라는 협의 의 매우 특정한 조항이거나 보다 광의의 황금률 혹은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일반 원리이건 간에)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해된 성서의 윤리적인 가르침에 일치하며 살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주의의 두 번째 모습은, 우리가 착해지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기독교인이 되는 이러한 옛 방식은 죄와 죄책감 그리고 용서의 역학 상태를 중심 으로 한다. 정말, 얼마나 죄와 용서가 이러한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한 방식에서 중심을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예배는 죄의 고백을 포함 하는데, 대부분의 성찬식에는 (이것은 미사나 주의 만찬 즉 성찬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심에 죄, 속죄기도 그리고 용서가 있다. 심지어 상당 수준의 자유 교회에서도 죄와 용서는 강조되고 있다. 우리의 매 아침 예배시간은 죄 고백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아침 9 시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나쁜 놈이 되어버리고 만다.
여섯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옛 방식은 내세-중심적이다.
기독교인 으로써, 나는 어릴 때부터 구원의 근본적인 의미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배웠다. 실로, 천국이란 것은 너무도 중요해서, 만약 당신이 내가 열두 살 때 천국은 없다고 확신시킬 수 있었더라면, 나는 내가 기독교 인이 되어야만 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전혀 갖지 않았었 을 것이다. 그만큼 천국은 그 자체로 전부인 셈이다. 정리해보면, 이러한 옛 이해를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나중에 구원을 받으려면, 지금 기독교인이 되십시오.” 약간의 수정만으로 같은 말을 표현할 수 있다: “나중에 천국에 가려면, 지금 기독교를 믿으세요.” 그리고 강조점은 “믿다”에 둔다. 즉, 진실해지기 위해 이런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성서와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은 이제는 서구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더 이상 어린 시절에 당연했던 문자주의적 태도는 참아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선조 대부분이 가졌던 그 자연적인 문자주의가 대부분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의식적인 문자주의는, 물론,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부가사항이 아니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이러한 옛 시각의 관점이, 사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에 게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들과(이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 모두에게, 종종 전통적 기독교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를 이해하는 이러한 옛 방식은 “기독교 전통”이 아니라 할 수있다. 오히려, 이것은 지난 수 세기의 상황으로 빚어진 (성서를 포함한) 전통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역사적으로 조종되어진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독교 전통을 지키느냐 혹은 버리느냐에 있지 않고, 이해하는 방식의 전환에 있다. 문제는 우리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전체로 보고 읽을 수 있는 렌즈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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