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환경신학

Narin Pusil 2019. 12. 14. 09:46

들어가며


오늘날 환경문제는 부분적인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요청되는 과제이다. 더욱이 창조질서의 보전으로 요약되는 교회 환경운동에는 구체적인 실천운동과 더불어 참된 환경보전의 의미를 제시 할 수 있는 환경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럼 의미에서 성서적, 신학적인 시각으로 환경문제를 이해하는 서적들을 통해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적 시각을 엿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교회 환경운동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점차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환경신학은 그 탐구성과가 충분하게 있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연구노력이 요청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나온 몇가지 환경 관련 교회 서적들을 살펴보면 그 개괄적인 내용은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안에서 환경신학과 관련되는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서적으로는 아일랜드 골롬반 선교회 사제로서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20여년간의 선교생활을 통해 필리핀의 자연이 파괴되는 과정을 의미심장하게 지켜보며 환경오염과 이에 따른 파괴에 대해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이에 따른 새로운 신학을 추구하는 숀 맥도나휴 신부의 「땅의 신학」(To Care for the Earth: 지구보전)을 썼고,  「교회의 녹화」(The Greening of the Church)를 써 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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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화잇(Lynn White, Jr.)은 지난 1967년 Science 155호 지에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글에서 그리스도교의 창조교리가 현대 환경적 위기의 뿌리가 된다고 주장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창세기 1:28에 나오는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말씀이 오늘날의 환경적 재난의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야 말로 환경 파괴의 큰 죄책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죤 패스모어(Jon Passmore)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서 린 화잇 격한 주장을 배척하는 폭군으로서의 인간(man as despot)론을 전개하였다. 패스모어는 창세기 1:28을 관리자로서의 인간이 청지기적 정신을 짓밟고 전제주의자가 된 인간 중심의 헬라적 사상이 환경파괴의 주 동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린 화잇의 주장에 동조하는 급진적 환경신학을 펼쳐왔다는데 있다. 이런 급진주의자의 선봉에는 천주교 사상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가 있다. 베리는 “지구의 꿈”(1988)이라는 책에서 오늘날의 환경문제 배후에는 ‘신성이 자연계를 초월하는데“ 돌려 질 수 있다고 보아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물고 늘어진 느낌가지 주고 있다. 그는 프란시스를 환경주의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는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성경 본문에 서린 돌보고 지키라는 메시지와 정의롭고 평화로운 통치와 땅을 관리 경작 하라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이 인간은 천연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범하여 타락하였고 이 타락성이 곧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창 3:18)으로 이어졌다. 타락한 인간의 무모하고 횡포스럽고 광란적 천연계 파괴는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급속하여져 왔다. 유물론적 환경관은 지구의 자원 개발이라는 과대 망상적 파괴는 지구의 에코 시스템의 급격한 변모, 즉 기후의 변화까지 몰고 온 것이다. 이런 환경파괴 뿌리에는 인간의 탐욕적 이기심과 자기 욕구 충족이라는 인간 중심의 죄악적 발상이 도사리고 있다. 


환경론적인 위기는 인류의 탐욕과 선한 청지기 정신을 배척하는 일에서 나오고 있다. 하나님이 설정해 놓은 청지기주의 정신을 유린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인간의 탐욕은 제지되어야 한다. 이런 인간의 탐욕이 부메랑이 되어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켜 오고 있다. 각종 자연재해에는 사실상 인간이 뿌린 것을 거두는 결과들이 많다. 창조세계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무책임하며 무제한적인 자원개발이라는 고삐 빠진 과소비주의를 제어하여 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범신론적 환경관을 신봉하라는 것이 아니다. 피조세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을 보호하는 시각과 정책이 펼쳐져야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건실한 라이프스타일을 일깨워 나가는 애드벤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출처: https://ockam.kr/25 [순례자의 여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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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환경)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

과 목:최근신학의 동향

담당교수:김명용 님

제 출 일:1998년 6월 11일

제 출 자:신대원 3-b반 9631176  천 세종


서 론



지금 세계는 “앨리뇨”라고 불리는 거대한 상대와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지난 겨울에는 세계곳곳이 폭설과 폭우로 큰 피해를 입었고,지금은 온 세계가 너무 일찍 찾아온 이상 고온으로 몸살을 알고 있다.혹자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자연의 보복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어떻게 평가하든간에 지금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환경 오염이다.이런 생태계의 위기는 이제 온 인류의 당면과제가 되었고,인류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생태계 위기와 원인을 알아보고,성경의 창조 기사를 통해 바람직한 창조 신학,환경신학의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 론


1.생태계의 위기와 원인


A.위기의 상황


지금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환경 오염에 있다.이러한 환경오염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는데, 대기오염,수질 오염,토양 오염이 그것이다. 이러한 오염들은 서로 상호연관 되어생태계를 파괴 시키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먼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대기 오염이다.이러한 대기 오염은 가정, 공장, 자동차에서 사용되는 석탄,석유 등의 화석연류가 연소될 때 나오는 질소산화물과 아황산가스로 인한 산성비, 또 이때 나오는 메탄가스, 탄산가스로 인한 지구 대기의 온난화 현상, 그리고 냉장고,에어콘,스프레이 등을 사용할 때 배출되는 프레온 가스에 의한 오존층의 파괴현상을 들수 있다.이러한 대기의 오염은 천식,호흡기 장애와 같은 직접적인 질병을 일으킬 수 있고,강력한 자외선의 침투는 피부암등의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게 되고,엽록체를 파괴하여 농장물의 수확에 악영향을 주게되며,가축의 발육도 저하 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지구온난화는 사막지역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있고 해수면의 상승으로 많은 육지가 바다에 잠기데 될 수있다.


수질의 오염은 가정에서 버린 하수,공장의 폐수,농약,화학비료,가축의 배설물 등으로 수질이 오염되는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 생활하수와 공장의 폐수등이 여과 장치를 재대로 거치지 않고 강으로 배출되고 있고,이러한 강의 오염은 식수원의 오염으로 이어진다.또한 수질 오염으로 인해 어족 자원들의 기형적인 모습을 출현하게 되기도 하고 이들속에 저장되어 있던 중금속과 같은 오염물질은 먹이 사슬을 통해 인간들에게 영향을 주게된다.이러한 수질 오염은 대기의 이상과 연결되어서 동물성 플랑크톤의 급속한 번식으로 인한 적조 현상과 같은 치명적인 해를 입히게 되기도 한다.


토양오염은 도시와 공업지역에서 배출되는 막대한 폐기물과 상당량의 도시 쓰레기로 인해 발생한다.비닐 제품과 같이 썩지 않는 쓰레기는 심각하게 토양을 오염시키고,농약의 무분별한 사용 또한 토양 오염의 주 원인이 된다.이러한 오염은 토양의 산성화를 촉발하게 되는데,산성토양은 식물의 필수영양소인 칼슘,마그네슘,칼륨과 같은 것들을 쓸어가는 대신 카드뮴,알미늄과 같은 중금속이 물에 녹는 형태로 바뀌어 식물과 생태계에 영향을 준다.이러한 토양의 오염은 땅 속의 미생물과 벌레가 죽게 만들고 농작물의 성장과 발달을 저해하며 먹이 사슬을 통해 초식,육식 동물과 인간에게 이르기 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B.생태계 위기의 원인


1) 이원론적이며 인간중심적인 사고


헬라의 철학자들은 인간과 자연을 이해함에 있어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였다.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참된 본질은 영혼이다.따라서 영혼은 고결하고 영원하지만, 육체는 천하고 일시적이다.따라서 육체라고 하는 감옥에서 영혼이 풀려 나서 자유롭게 되는 죽음은 해방의 순간이며 구원의 순간이 된다.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는 서구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고,세상을 악과 선으로 밝음과 어두움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사고 구조가 되어 버렸다.


서구 사상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플라톤의 이원론의 영향으로 영혼과 몸,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도식의 세계관에 의한 왜곡된 가치관을 형성하였으며 이것은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발전하고 인간중심적인 신앙으로 전통화 되었다.이러한 신앙관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신학자들,사상가들에게 있어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어거스틴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땅과 자연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복은 땅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땅과 자연은 하나님의 흔적에 불과 하므로 땅과 자연은 인간에 의해서 이용되고 다스려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베이컨도 인간은 자연에서 모든 것을 빼어 쓰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이원론적인 사고는 자연스럽게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발전하였고,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해야 하며, 착취하여 인간의 부를 증진 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하여 왔던 것이다.



2)정치,경제적인 원인


얼마전 까지 우리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했던 연무에 관한 것이었다.개발방지법이 실행되기 전에 많은 화전을 이루어 놓으려고 했던 원주민들에 의해 일어난 연무는 대도시를 뒤덮었고 이웃나라들에 까지도 영향을 주었었다. 밀림을 개발한다는 미명아래 행해지고 있는 아마존의 무분별한 개발 역시 인류의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지만, 브라질 정부는 국토 개발의 차원에서 이 일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이러한 현상들은 무한 경쟁의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 나라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선진국과 경쟁해야 하는 개발도상국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천연 자원들을 개발함으로써 경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경쟁은 세계모든 국가 특별히 선진국들의 “확장 의지”에 의해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이러한 확장이 의지는 발전과 진보,그리고 개발이라고 하는 개발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여, 이러한 확장을 정당화 해 주었다.


이러한 확장 경재의 이면에는 현대인들의 “소비”, “향략”지향적인 성향이 자리하고 있다.현대인들은 더 많이 소비하고 싶어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향유하길 원한다.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해서 누리게 되는 풍성한 삶이 모든 사람들의 노력의 근거요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한정된 재화를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자연 스럽게 자연을 착취하게 되고, 자연의 오염과 파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3)창조에 대한 잘못된 성서해석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소위 “창조 이야기”가 나와있다.이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요,완성인 것처럼 나타나고,인간이야 말로 모든 세상의 중심인 것 처럼 이해되기가 쉽다.그리고 사실 이 창조 이야기는 그렇게 이해되어 왔다.이런 창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독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간이 창조의 중심점, 만물의 영장, 하나님 피조물 중의 왕관을 받을 만한 존재라고 이해가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이러한 인간중심적인 이해는 그 당시 근동의 여러 국가들이 인간을 신의 하수인,신을 위한 종 정도로만 이해했던 것에 비하여 볼때에는 인간존재의 존엄성을 강조한 가치관에 있어 일대혁명과도 같은 긍정적인 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으로 이해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창조 하신 자연만물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생물을 다스리고,땅을 정복하라(창 1:26-28)고 하셨다.기독교의 역사속에서 이런 창세기의 증언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특별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인 인간은 그렇지못한 자연과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이해되게 되었다.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생물과 자연과 땅을 착취하고 파괴하였으며,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특별한 존재로서의 왜곡된 특권을 행사해 왔던 것이다.




2.창조 신학에 대한 성경적 이해


A.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이 오해해 왔던 것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첼렘)”에 관한 것이었다.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자연과는 다른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 공동체적 이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고,그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는 좋았더라(토브)라고 하셨다.둘째날을 제외하고,하나님은 매일 창조하신 것들을 보시며 좋았다는 긍정평가를 하신것이다.이것은 창조된 만물이 그 나름대로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존재의미와 기능,가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창조도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 한부분으로서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파악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기독교 신학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특성, 영적인 특성을 의미 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왔다.즉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영적 특성, 곧 영혼을 하나님의 형사으로 이해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바른 성경적인 이해가 아니다.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도는 기독교 교육의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에서 보여진다.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시듯이, 세분이신 하니님께서 한분이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듯이, 좀더 교육적인 용어로 표현해 본다면 공동체로 존재하시듯이 우리도 공동체로 살아가야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이러한 하나님 형상에 대한 공동체적인 이해는 아담이 하와를 만났을 때 이는 내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창 2:23)에서 잘나타난다.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공동체적인 모습은 확장되어서 자연과의 공생에서도 드러난다.아담은 동물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모습(창 2:19)이 보인다.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공동체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함께 살아감으로 해서 행복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적인 모습은 범죄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분열된 모습(창 3:1절 이하)을 보여준다. 죄를 범함으로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 되었다고 하는 의미는 바로 이렇게 공동체적인 삶이 파괴되었다고 하는 의미이다.



2)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이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해하는 것이다.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개념은 고대 중동지역의 대리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에집트의 왕의 신학에 의하면 파라오는 땅 위의 신의 형상이었다.그는 신을 대리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자였고, 신의 위임을 받은 자였고 땅위에 있는 신의 광채요, 그의 현현의 방식이었다.고대 중동지역의 형상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은 파라오는 그의 제국의 모든 집에 세운 그의 형상 속에 현존한다.그러므로 제국 곳곳에 존재하는 파라오의 동상은 그가 그곳을 지배한다는 것의 상징이었다.따라서 파라오의 형상은 파라오를 대신해서 다스리는 눈에 보이는 대리인이었다.이러한 사상은 에집트 뿐 아니라 바벨론의 왕에게서도 나타나는 데, 바벨론 왕이 신의 형상을 가져다고 하는 것은 왕의 기능과 책임이 그의 신을 대리해서 백성을 다스리고 적으로부터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즉 고대근동에 있어 왕이란 신을 대신하여 신의 뜻을 실천하는 자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잘 관리하고 왕같이 창조질서를 보존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는 뜻이며,인간을 통해 땅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가 드러난다는 의미이다.그러므로 인간은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주권의 표시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의 통로이다.



B.다스림과 정복에 대한 이해


1)“다스리라”에 대한 바른 이해


창조 이야기에 있어 가장 심하게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은 아마 창세기 1장 26-28절에 나오는 “다스리라”,“정복하라”는 말일것이다.그렇다면 이말의 뜻은 무엇일까?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다스리라”는 말은 “라다(radah)"라는 말이다. 이말은 원래 고대 이집트와 바비론의 궁중 언어로서 “돌본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황제가 그 땅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곧 다스리다라고하는 말의 뜻이다.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자로 창죄되었다고 하는 말은 자연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세계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거꾸로 돌보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스리다는 말은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쓰는 동사며,수직적 관계에서 지배한다는 뜻보다는 수평적 관계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창조 세계에 살아가는 생물들이 인간에 의해 영속히 보호되고,잘 보존되도록 보살핌을 받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는 명령이다.



2)“정복하라”에 대한 바른 이해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카바쉬(kabash)"라고 하는 말이다.우선 이말은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진술하고 계시는 중에 나온 말이다.“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그리고 땅을 정복하라”는 복의 선언에서,땅에 충만하라는 말과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병행하고 있으므로 같은 복의 반복을 이야기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여기서 “충만하라”는 말은 “넘치게 채우다”라는 뜻을 가지는 데 성경의 인물들이 많은 자녀로 땅을 채우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따라서 정복하는 말은 ‘땅에 충만하여라’,‘땅을 경작하여서 풍성한 복을 받아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정복하라”는 말은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돌보고 가꾸면서 자연의 소산물을 먹고 건강하게 하는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다.여기서 말하는 “정복”이라고 하는 말은 자연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공생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움직이는 생물들을 살피고 보호하며 섬김으로 창조질서를 보존할 뿐 아니라 땅을 경작하고 작물을 재배하여 필요한 식물을 얻어 풍족한 삶을 영위하며,다른 피조물과 함께 땅에 번성하여 충만케 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계명을 완성하는데에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대리인 으로서의 인간의 사명과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선한 청지기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3.새로운 창조 신학


A.그리스도의 우주적 화해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관심은 인간이었다.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제는 그 대상이 확대되어야 한다.특별히 창조신학,환경신학에 있어 자연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화해이시다.생태신학에서 예수는 우주를 하나님과 화해시킨 우주적 그리스도이시다.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 화해의 우주적 차원을 말하고 있다.“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여기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화해는 인간의 구속과 화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주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창조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얻고 하나님과 화해한 것이다.그리스도의 구원은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인간에게만 국한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너무 좁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하나님은 고통하고 신음하는 피조물(롬 8:19-21)들을 굽어살펴 보시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리고,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땅은 인간의 해방과 구원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해방과 구원의 상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인간과 자연,동물과 동물,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 있는 평화의 공동체이다.이러한 나락 이루어질 때 우리가운데 부서진 하나님의 형상은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B.하나님 중심으로의 전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생태계의 위기를 가져온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중심적인 이기심이다.하나님의 형상이 범죄함으로 파괴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고,이런 이기심속에서 끊임없는 소외감,분리감을 체험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이런 인간중심적 이기심과 사고는 곧 지금의 사회 경제 정치를 망라하는 전체 사회 문제의 핵심이 되어있고,환경신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이렇때에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호 6:1)고 외쳤다.이런 외침은 모든 선지자들의 음성이었고,수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한결같은 호소였다.이 자연과 역사의 주인공 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신명기 기자는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신 10:14)”이라고 말한다.시편의 기자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고 선포하고 있다.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를 지키고 가꾸는 청지기로 부름 받았던 우리 인간들은 그동안 주인인 척하며 살아왔던 것이다.이제는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해야한다.이제는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과 화해를 경험한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고,하나님 중심의 사고,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해야만 한다.이제는 본연의 청지기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C.창조 보전을 위한 노력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만물을 잘 가꾸고 돌보아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살펴 보았다.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이땅 위에서 계속해야하는 청지기로서,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완성해야할 하나님의 동반자로서 인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새로운 생명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이미 이러한 움직임은 1983년 캐나다 뱅쿠버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6차 대회에서 시작된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운동을 통해, 1989년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 개혁 교회총회에서 창조의 보존(Integrity of Creation)을 중요 주제로 삼음으로 해서 이미 시작되었다.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서 인간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창조의 질서를 보존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운동이다.엄밀하게 말한다면 성경은 여러 가지의 생명운동으로 가득차 있는 책이다.예수의 사역은 모든 것이 생명운동이었다.모세의 출애굽도,예언자들의 애타는 외침도 결국은 생명운동이었다.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파괴되어가고 신음하고 있는 자연에게 전해주는 것이 생명운동이다.하나님의 대리자로 자연을 섬기고 잘 가꾸어야 하는 사명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다.주님은 이 일을 위해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모습과 그 원인을 살펴보았고,새로운 창조신학을 위해 창조에 관한 성경의 증언의 참된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창조하신 이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들이 가꾸고 사랑하고 보전 해야할 우리의 이웃이다.이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완전한 창조 사역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의 동역자로서 우리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와 실천적인 노력들을 통해 창조질서를 보전해 가야할 것이다.



<참고 문헌>


출판 도서


1) 김명용, 현대의 도전과 오늘의 조직신학 (서울:장신대출판부,1997)

2) 고용수, 만남의 기독교 교육 사상 (서울:장신대출판부,1993)

3)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4) 이정배 편저, 생태학과 신학:생태학적 정의를 향하여 (서울:종로서적, 1989)


학위논문


1) 손병렬,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교회의 새로운 과제” (장신대 신대원, 1991)

2) 문해연,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새로운 창조신학의 모색” (장신대 신대원, 1993)

3) 김은득, “창조질서 보전에 관한 고찰”(서울신대 대학원,1991)


잡지 기사


1) 김영한, “개혁주의 생태신학,어떻게 할 것인가” 목회와 신학 51호, 1993년 9월호

2) 목창균, “생태학적 신학과 창조신학” 목회와 신학 38호, 1992년 8월호

3) 김명용, “전통적 창조신학과 새로운 창조신학” 교육교회 204호, 1993년 7월

4) 강사문, “창세기 1장 26-28절의 생태신학적 이해” 이종성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 (서 울:대한기독교서회,1992)

5) 황승룡, “개발 이데올로기와 창조질서 보존” 목회와 신학, 1993년 9월호

6) 윤철호, “환경문제에 대한 교회적 대응” 교육교회, 204호, 1993년 7월호

7) 임창복, “창조 환경 보존을 위한 교회교육” 교육 교회, 204호, 199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