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프랑스 위그노 이야기

Narin Pusil 2022. 8. 26. 23:49

위그노(프랑스어: Huguenot)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역사적으로 프랑스 칼뱅주의자들로 알려졌다. 칼뱅주의와 그것에 관련된 신앙 단체들(위그노, 청교도, 장로교와 다른 개혁 교회들)은 기독교 이론의 지속적인 장 칼뱅의 유일한 해석을 대표한다. 신앙의 최고권을 옹호하는 과로들에 추가로 칼뱅주의는 2개의 교의들 - 인간의 노력의 관점을 암시하는 "종교로서 일생"의 독트린과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전체적으로 미리 예정되었다고 주장하는 숙명론의 독트린에 의하여 가장 두드러졌다.

 

위그노’(Huguenots)라는 말은 “독일어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에서 왔다. 이는 ‘동맹’ 또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연결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축약해 ‘아이그노트’(Eignot)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위그노’’(Huguenots)가 되었다. 이것은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에 동참한 프라이부르크와 베른의 동맹에서 유래 되었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캘뱅의 신학을 따르는 16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가르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위그노라는 말이 프랑스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60년부터이다.프랑스 개신교 위그노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프랑스인들의 정신속에 흐르는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광야교회시대’, ‘위그노’, ‘위그노 십자가’, ‘레지스터’(저항하라), ‘톨레랑스’, 망치와 모루, '디아스포라 위그노' , '카미자르 정신'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포함한 8명의 미국의 대통령들이 의미있게 증명된 위그노 혈통을 가졌다. 추가적으로 자신의 아들 폴 리비어가 유명한 미국 독립 전쟁의 혁명가가 된,  폴 리비어 1세는 위그노 계통의 미국 식민주의자였다

 

프랑수아 뒤브아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Guerres de Religion (1562 ~ 1598)

 

16세기 후반 발루아-앙굴렘 왕조 프랑스 왕국에서 37년에 걸쳐 진행된 대대적인 종교 내전으로, 프랑스 종교전쟁(guerres de religion/French Wars of Religion)이라고도 불린다. 가톨릭과 개신교(칼뱅파 위그노)의 갈등이 극에 달해 나라 전체가 뒤집혔던 사건이었다.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각국이 얽혀들어갔던 이 사건은 백년전쟁 시기 이후 프랑스의 중흥을 이끈 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이를 대체해 훗날 절대왕정을 수립하게 되는 부르봉 왕조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위그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에 대한 멸칭이다.

 

 

위그노 전쟁(1562년 - 1598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종교 전쟁으로, 1562년 3월 1일 로마 가톨릭 세력이 프랑스내 개신교도(위그노)들에게 자행한 학살인 '바시' 학살로 인해 시작되었고, 위그노의 수장이었던 앙리 4세가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국왕에 즉위한후, 1598년에 낭트 칙령을 발표함으로 신구 기독교 간의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상공업 계층이 많았다. 이는 직업소명설을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가 프랑스 상공업자들에게는 '복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위그노 전쟁은 종교의 자유가 명분이지만, 보통 초기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옛날체제(앙시앵 레짐)에 반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귀족 등의 전통적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면서 사회 체제를 경직시키고 있었고, 이러한 보수적인 신분 사회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심각한 제약이었다. 무역으로 성장한 네덜란드도 유사한 경우이며, 독일 북부의 영주들이 신흥 세력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원한 것도 기득권 세력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칼빈주의의 성장

 
프랑수아 1세는 해를 거듭할수록 퍼져가는 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간주하는데 신중함을 보였다.개신교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인 루터주의의 형태로 프랑수아 1세 (1515-47) 때에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프랑수아는 원래 이단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가톨릭교리와 정통 신앙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이단인지를 규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루터의 글은 파리 일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루터의 주장보다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희망했다. 1535년 1월에 프랑스의 모든 "루터교도"들은 '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을 따르게 되었다.   
 
 

 

 

 

​프랑스 위그노 이야기

 앨리슨 그랜트, 로날드 메이요, 조병수 역  /  가르침, 2018.06.01.

 

 프랑스에서는 30년간 종교전쟁(1562-1598)이 있었는데, 1598년 4월 낭트칙령이 있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핍박을 받았고 순교했는지 모른다. 이 종교전쟁을 다른 말로는 위그노 전쟁이라 한다. 개혁파(위그노)와 로마가톨릭과의 전쟁이었다. 발단은 1572년 8월 24일 바르톨로뮤 날의 대학살로부터 시작된다. ‘여왕 마고’(사실은 마고는 여왕이 아니라 공주다)라는 영화도 나왔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결혼식날 밤에 죽임을 당한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루터가 이신칭의를 발견하기 전부터 위그노들은 자크 르페브르(1455-1536)등에 의해 이신칭의를 가르침 받고 있었으며, 루터의 성경 번역 이전에 이미 프랑스 성경을 가지고 읽고 있었다. 지금의 프랑스는 너무나 미약한 개혁파 신앙인이 있지만, 종교개혁 당시에는 최초로 종교개혁자로서 모오(Meaux)에서 화형당한 ‘장 르클레르’( -1525.07.29)를 비록해서 너무나 많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며 바른 신앙을 지키려 했다.

 

  프랑스도 종교개혁 후 대부분의 다른 나라가 그러했듯이 처음 시작은 루터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칼빈과 개혁파 신학의 영향을 받아 루터에게서 개혁파로 돌아선다. 사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왈도파를 비롯해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그 나라 자체에 개혁신학이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로마가톨릭에 의해 그것이 핍박과 추방으로 프랑스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나 이들이 스위스는 물론이고 독일, 영국, 네덜란드,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로 이주해 그곳에서 신앙을 꽃피운다. 사실 모오 지방의 감독이었던 기욤 브리소넷(1445-1514)을 비롯해 프랑소와 1세의 자문 위원이었던 루이 드 베르끼, 르페브르의 제자인 쟈크 파방, 르페브르의 또 다른 제자인 기욤 파렐에 이르기까지, 아니 칼빈에 이르기까지 위그노는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사실 프랑스의 위그노는 내 개인적으로 흠모의 대상이었고, 정말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한국에는 너무나도 소개가 되지 않았기에, 이 책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반가웠다. 위그노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고 떨려서 책 제목을 보고, 이 책을 당장 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온라인으로 책을 구매하는 이들의 병폐다). 그러나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위그노 전쟁을 중심으로 한 그저 일반적인 역사이야기에 불과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위그노의 신학이나 종교개혁자들과의 관계, 그들의 신앙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그러한 이야기는 없었다. 위그노의 위대한 신학자들이나, 그들의 업적도 전혀 언급이 없었으며, 그들의 어떻게 피난을 다니며 어떻게 신앙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이 책의 저자는 어떤 사람인지도 소개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구글에서 찾아보았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단지 이 책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었다는 것과, 이 책과 유사한 역사서를 썼다는 것 외엔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만 소개했어도 좋으련만. 차라리 이런 부류의 책이라면 좀 더 학문성이 있고, 전문성이 있는 ‘그리심’에서 나온 ‘프랑스 종교개혁사’(강남수 저)를 추천하고 싶다.

 

 물론 조병수교수님께 이 책을 내 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위그노에 대해 너무나 소개가 없는 터에 그나마 위그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학문적인 깊은 연구를 원한다면 이 책은 너무나 많이 미흡할 것이다. 허이 책은 일종의 가벼운 역사이야기 정도라고 해야 할까. 허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고난을 받았고, 왜 프랑스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그 값을 다할 것이다.

​또 이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칼빈이나 파렐과 같은 이들도 위그노에게서 신앙을 배웠다는 사실을 안다면 위그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동의할 것이다. 그 외에도 위그노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 누구보다 오늘날 우리 신앙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교개혁하면 루터라고 하는데, 루터를 어떻게 종교개혁자의 뿌리라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위그노들이 남긴 업적에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는 루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루터 이전에 이미 독일어 성경도 있었고, 이신칭의 교리도 다 있었다). 그 정도로 우리의 뿌리는 루터가 아니라 왈도파요, 위그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신앙의 뿌리를 찾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추천한다. 그저 일반 역사책에 불과하고 신학적인 부분을 다루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출판사 책소개

  프랑스 신교도를 통틀어 일컫는 위그노는 종교개혁 어간부터 박해와 피난을 겪으면서 지금 소수로 남기까지 자그마치 500년 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위그노가 이처럼 긴 고통의 역사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며, 보장된 성공과 소중한 삶터 그리고 고귀한 목숨까지 신앙을 위해 아낌없이 내버린 위그노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여러 사건들과 여러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여 온갖 모진 고난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려 했던 위그노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영화처럼 보여준다. 독자는 이 책으로부터 신앙을 위한 프랑스 위그노의 희생을 톡톡히 읽어낼 것이다. 믿음을 위해 흙에 쏟은 붉은 피, 박해 앞에서 공포에 찌든 마음, 기나긴 피난생활로 타버린 육체, 그리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도 감사하던 뜨거운 눈물 말이다.

 

 

목차

일러두기 …… 7

저자의 말 …… 11

1장. 피난 …… 13

2장. 초기 위그노 …… 18

3장. 종교전쟁 …… 29

4장. 성 바돌로매 축일 …… 44

5장. 평화의 예술 …… 55

6장. 포위 그리고 항복 …… 73

7장. 박해 …… 87

8장. 낭뜨 칙령 철회, 노예 그리고 항전 …… 101

9장. 이주 …… 114

10장. 영국의 위그노들 …… 128

11장. 이야기를 마치며 …… 143

자료출처 …… 147

계보 …… 149

역자후기 …… 150

그림목록 …… 151

 

  < 본문 중에서 > 

 아믈랭은 여행 간에 마침내 프랑스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쌩똥스 주에 있는 쌩뜨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기에 신교교회를 세웠고 첫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나 그는 주교의 명령으로 체포되었고, 동료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신분이 낮고 파난한 다섯 사람이 아믈랭의 사역을 계속하기고 결심하고, 다른 신교 신자들과 함께 주일마다 모여, 비록 목회자는 아니지만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목사님이 생겼고,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성도가 점점 많아졌다. 그 목회자가 떠나자 세 번째 목회자가 나타났다. 성도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목사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 가련한 사람은 마치 죄수처럼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저녁때가 되면 사과를 먹는 것과 물을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하기 일쑤였습니다. 식탁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종종 자기 셔츠 위에 음식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만큼 우리 교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잘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에게 사례를 드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박해와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에서 신교도들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즉시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위의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계속 글을 이어갔다.

 

 "신교 신앙이 몇 년 새에 너무나 창성하게 꽃피어 벌써부터 놀음, 춤, 가요, 술자리, 사치스런 머리 장식, 허례허식 같은 것들이 거의 그쳤습니다. 더 이상 욕설이나 살인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주일이 되면, 동업하는 상인들이 들과 숲과 쾌적한 장소를 거닐면서 무리를 지어 시편과 찬송가와 경건한 노래를 부르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교육하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시기에, 그 교회의 설립자인 필리베르 아믈랭은 헛되이 사역했거나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음을 동료들이 입을 모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쌩뜨의 신교도들은 시편찬송을 부르며 산책하는 짓을 오래 누리지 못하였다.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밤중에 비밀리에 예배를 드려야만 했기 때문이다(그렇게라도 할 수 있게 목숨을 부지한다면). 프랑스 전역에서, 특히 서쪽 지방과 남쪽 지방에서 아믈랭 같은 용감한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을 계속해서 퍼뜨렸고, 1560년대에 이르러는 위그노의 숫자가 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교회는 큰 당혹감에 사로 잡혔고, 위그노의 확산을 막겠다는 구실로 박해를 더 일반화했다. 그 결과로 1562년에 시민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그 전쟁은 프랑스 국왕들이 저지할 수 없는 것인데다가, 때로는 자신들도 참전하는 전쟁이 되었다. 많은 귀족들이 자기들의 더 큰 야심을 이루기 위해 전쟁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추종자들을 얻는 가장 쉬운 길이 자신을 열렬한 가톨릭 신자나 또는 독실한 신교 신자라고 공표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어떤 귀족들은 실제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거나 신교 신자였다. 마침내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투들이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프랑스 종교전쟁이다.

p.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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