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신학 이야기

신약성서신학 / W. G. 큄멜

Narin Pusil 2022. 5. 30. 09:53

신약성서신학 : 주요증인들에 따른

(W. G. 큄멜 / 성광문화사 / 1992.10.10)

저자 W.G.큄멜은 190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출생했다. 1929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스위스 쮜리히와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약정경개론”, “신약성서신학”등이 있으며 진보통합적인 입장에 서 있는 신약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69년에 출판되었고 1985년에 박창건 역자에 의해 성광문화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큄멜은 예수의 선포가 추대의 신앙공동체의 증언을 통해서만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신학의 서술을 예수의 선포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한가를 묻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예수의 신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다음으로 원시 공동체의 신학, 그리고 요한의 신학을 다루고 있다. 그는 네 명의 주요 증인들을 통해서 말해진 여러 가지 성경의 내용들을 연구하여 신약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밝히려고 하고 있다. 특히 ‘성서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각 메시지의 주체들이 말하고 있는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먼저 각각의 화자들의 이름으로 내려오고 있는 성경의 메시지들을 연구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고 그 연구를 통해서 화자가 말하고 있는 신학적 구조들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있다. 물론 너무 방대한 내용을 다루다보니까 좀 산만한 듯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예수의 신학, 원시 공동체의 신학, 바울의 신학, 요한의 신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 목차

1. [처음 세 복음서들에 따른 예수의 선포]

2. 역사적 예수의 문제

3. 하나님 나라

4. 하나님 선포

5. 하나님 요청

6. 예수의 인격적 주장

7. 예수의 고난과 죽음

8. [원시 공동체의 신앙]

9. 부활절 신앙

10. 팔레스틴 원시 공동체의 그리스도 신앙

11. 헬라주의 공동체의 그리스도 신앙

12. 교회의식

13. [바울의 신학]

14. 바울의 역사적 위치

15. 구원시대의 현재

16. 그리스도 사건

17. 세상에서의 인간의 멸망

1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19.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과 그리스도의 사명

20. 바울과 예수

21. [제 4복음서와 요한 서신들의 그리스도 복음]

22. 요한 신학의 역사적 위치

23. 요한의 그리스도 복음의 기본 성격

24. 요한의 그리스도 상

25. 구원과 구원의 길

○ 저자소개 : W. G. 큄멜 (Werner Georg Kümmel, 1905 ~ 1995)

W. G. 큄멜 (Werner Georg Kümmel, 1905년 5월 16일 ~ 1995년 7월 9일)은 1905년 5월 16일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출생했다. 1929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스위스 쮜리히와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신약정경개론”, “신약성서신학” 등이 있으며 진보통합적인 입장에 서 있는 신약학자라고 할 수 있다.

큄멜은 1905년 5월 16일 하이델 베르그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2년에 부교수, 1946년 스위스 츄리히 대학에서 신약학 정교수가 되었고, 1951년 독일 마인쯔 대학을 거쳐 1952년 이후 마르부르크 대학에 신약학 교수로 있다가 1971년에 은퇴하였다.

연구 논문 (Thesis)으로 Römer 7 und die Bekehrung des Paulus, 저서로 ‘약속과 성취’, ‘신약정경개론’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신약성서신학’ (주요증인들에 따른) 등이 있다.

– 역자 : 박창건

○ 독자의 평

과연 역사적 예수에 관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는 이 부분에서 자료들에 대한 문제와 그 안에 담긴 신학적 난점들을 지적한다. 즉, 역사적 예수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증명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해 낸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상과 신앙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의 역사적 현실 앞에서 어떤 일치점이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신학을 얘기할 때 그가 선포했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중심으로 신학적 메카니즘을 밝히고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례자 요한에 의해서 먼저 선포되었다. 요한은 세례를 강조했다. 그는 예수의 예비자로서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회심과 세례를 중요시하였고 “더 강한 자”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예수이며 예수 또한 세례자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대망을 선포하였다. 그의 선포는 세례자와는 달랐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외쳤으며 그 현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며 하나님 나라는 왕의 권력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 있으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왕의 통치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는 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은 과거에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진노자, 심판자, 승리자인가?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 의지를 예수에게 허용한 미래적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예수는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그것이 밝혀진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래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미래적인 종말을 우리에게 주시며 예수에 의해 죄가 용서되고 회개가 이루어진다. 글고 하나님께서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예수는 회개의 요청을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의 예고에 결합시켰으며 하나님의 미래적이며 현재적인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는 요청과 결합시켰다.

○ W. G. 큄의 ‘신약성서 신학‘ (박창건 역) 요약

제1장. 처음 세 복음서들에 따른 예수의 선포

1. 역사적 예수의 문제

⒜ 자료들에 관한 문제

제 4복음서의 예수는 처음 세 복음서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하게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사적으로도 다른 맥락에 서 있다.

마가복음의 예수의 삶에 대한 보도는 가장 오래된 보도로서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의 활동의 서술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가복음의 구성에 대한 더욱 정밀한 검토를 함으로써 예수의 활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이 서술은 사건들의 역사적 순서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기초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들의 맥락 안에 있는 개개의 본문들의 순서와 배열에서부터 어떠한 역사적 결론도 끄집어낼 수 없다.

복음서들의 배후에 놓여있는 전체적 구전 전승이 기독교 공동체의 선포와 교리의 맥락 속에서 그들의 형식과 변형으로 보존되었으며, 그러므로 단순하게 전승된 보도들과 말씀들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역사적 실제에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 신학적인 문제

루돌프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며, 신앙은 신약성서 증인들의 선포(케리그마)로 말미암아 일깨워졌다고 하면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기 위하여 케리그마의 배후로 소급해 가서는 안된다. 주님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즉 선포되신 분이다”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예수의 인격과 선포는 부활하신 분에 대한 신앙고백의 전제이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공동체의 설교의 전제이다.

2. 하나님 나라

⒜ 세례자 요한

우리의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활동,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하여 중언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마가복음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확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어 네 길을 닦게 하리라. 세례자는 예수의 길 예비자로서 묘사되고 있으며, 원시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이러한 길 예비를 분명히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에 대한 요청에서 보았다.

– 임박한 심판

세례자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심판의 설교는 요한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방법으로 현실화된다. 한편으로 그는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심판의 위협을 스스로 모면하려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한다. 다른 한편으로 세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심판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거짓된 희망을 부숴 버린다.

– 회심과 세례

그는 또한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죄사함을 위한 참회의 세례를 선포한다. 이제 요한은 회심에 대한 이러한 예언자적 요청을 요르단강에서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라는 촉구와 결합시킨다.

– “더 강한 자”의 오심

그러나 세례자의 선포에 따르면, 이러한 최후의 심판은 더 강한 자의 수중에 놓일 것이다. :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들메끈을 풀만한 사람도 못됩니다.” 세례자의 이러한 말은 아주 다양하게 전승되었으며, 그래서 그의 원래적인 말을 다시 밝혀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나,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 세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뒤에 보내실, 그리고 하늘의 형상으로서 자기보다 훨씬 위대하신 하늘의 심판자의 길 예비자로 자신을 의식하였으며, 그리고 그분의 심판은 궁극적일 것이라고 알았다. 그러나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세례자는 더 강한 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한 반면에 마태와 누가는 성령과 불의 세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 예수의 세례

세례자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가 요르단강의 세례자에게 와서 그로부터 세례를 받은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는 것과, 예수는 세례 받을 때에 그의 활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체험을 했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둘째로, 그들은 세례자의 설교에 관한 그들의 상세한 서술을 예수의 세례에 관한 보도에 앞서서 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예수는 세례자의 이러한 설교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는 세례자와 똑같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외침과 함께 등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이 세례자에게도 적절한 것인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나 그러한 비슷한 것들은 세례자의 그 밖의 다른 말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분명히 그것은 예수에게 있어서만 특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자가 하늘나라의 임박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심판의 임박함에 관해서는 말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예수

그러나 복음서들이 보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가 이런 식으로 세례자의 선포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적절한 것인가? 비록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례자의 종말론적 회개 운동에 연관되었다는 점이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그럼으로써 예수가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에 대한 세례자의 선포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나뭇잎의 무성함을 보고 수확이 가까이 옴을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의 현재도 판단하도록 가르쳤다.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 하나님 나라의 임박

그의 세대의 모든 사람이 죽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는 예수의 기대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통하여 확증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런 일들이 다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예수가 시간적으로 매우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외에도 예수는 누구도 이러한 도래의 정확한 기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강조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병행 ; 이러한 말씀의 본문이 물론 예수의 말씀이기는 어렵다) 예수는 그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든가 혹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유산을 약속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곧 도래하는 것으로 선포할 때, 강조점을 하늘과 땅의 소멸에 두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통치하실 것이라는 데 둔다. 여기서 특히, “영생”의 개념이 생겨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 중요한 것처럼 또한 “생명의 상속”에 대해서도 말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에의 참여를 약속하나 그 약속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에 결합된다. 그래서 예수는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이 좁아 그 길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할 수 있다.

– 하나님 나라의 현재

세례자가 “당신이 도래하실 분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예수께 물은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발견된다. 즉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세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곧 하나님을 믿는 “보잘것 없는”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종말적 행동에 관한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종말적 구원 약속의 실현에 대한 징표로서 인식할 수 있었다. 예수는 현재 안에 있는 이러한 종말 사건을 또한 하나님 나라와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 유대적 대망에 따르면 마지막 때에 구원을 가지고 오는 자만이 마귀의 두목을 결박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예수는 이러한 주장을 함으로써 그의 행위를 통하여 종말적인 구원은 이미 현재에 실행되었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그런 자로서 생각하고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에게 인격적 추종을 요청했다. 적은 무리에 관한 말씀은 예수의 현재에 연결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여의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작은 씨앗이 큰 수확을 맺는 것과 잡초가 나중에 다 자라 추수할 때에 제거되는 것과 누룩의 부풀어오르는 비유들은 예수의 설교와 활동의 불명료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영광스럽게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하려는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장이나 자기 전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기 활동과 선포의 빛 속에서만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 관하여 말했을 뿐이다.

3. 하나님 선포

⒜ 심판자

상황에 따라서 예루살렘을 “큰 왕의 도성”이라고 표현한 것과 똑같이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왕과 비교한 것은 오히려 예수는 전통에 따라서만 하나님을 왕의 모습으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에 의해서 경우에 따라 사용된 다른 유대적인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의 하나님 표상에 관한 어떤 것을 별로 알려 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기다림에 심판자 기다림을 결합시켰다는 사실을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미래적인 심판이 또한 중요하다.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권능을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영혼과 몸을 모두 죽여 지옥에 넣을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 예수가 자신의 주권적 의지를 그에게 허용한 미래적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비록 갖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전승된 예수의 말 가운데서는 결코 그러한 기대를 찾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 표상에 있어서 특징적이며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 미래적으로 행동하시는 아버지

예수가 분명하게 “하늘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너희의 아버지”, 혹은 “너희의 하늘 아버지”라고 말했으며, 특히 그 스스로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제자들에게 그와 같이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이것은 아주 특이하다. 예수는 왕과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미래적인 등장에 관하여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특히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미래적 행동에 관하여 말한다.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아버지께 간구해야 한다.

⒞ 회개 요청

회개하도록 요청하는 예수의 부름은 단순히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의 예고와 결합되었다는 점으로 인하여 특별히 다급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현재적인 하나님의 행동에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의 회개의 요청의 본질을 물어야 할 것이다.

⒟ 현재 행동하시는 아버지

예수는 미래적 비전을 가진 하나님뿐만 아니라, 현재 속으로 펼쳐 오는 인간을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에 관하여 말하였다. 예수는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죄인에 대한 용서로 선포하셨고, 그 용서를 약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 행동하게 하셨다. 예수는 죄인을 영접하여 용서하시는 뜻을 그의 행동 안에서 현재적 현실이 되게 하였다.

4. 하나님의 요청

예수는 회개의 요청을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의 예고에 결합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에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특정한 조건의 성취에 연결시켰다.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적이며 현재적인 행동을 다음의 이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는 요청과 결합시켰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하다.

⒜ 하나님 나라의 신의의 성취

예수가 신의 뜻을 실현하라는 요청을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와 연결시켰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유대사상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인간적인 노력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할 수도 저지할 수도 없다.

– 중간 윤리 ?

슈바이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요청을 “중간윤리”로 말한다. 종국적으로 예수에게는 모든 도덕적 요청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윤리는 “중간윤리의 의미에서 생각될 수 없으며, 예수의 윤리는 구원 시대의 윤리 혹은 새로운 계약의 윤리”로서 더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다.

– 예수의 요청과 유대 전통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하여 대표되던 예수 시대의 지배적인 견해는 율법을 단지 기록된 “성서”에만 국한시키지 아니했으며, 성서를 언제나 전통의 일부로만 보았다. 신의 뜻에 대한 근거의 규범은 예수 당시에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하여 주도된 유대교에서는 율법학자들에 의하여 지켜진 전체적인 전통이다. 율법과 전통의 권위에 대한 모든 원칙적인 인정에 있어서 당시의 유대적 율법 이해에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그의 의미와 영향에 있어서 소위 산상설교의 “반명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예수 안에서, 즉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말적 구원행동을 이미 현실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듣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뜻

예수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선포는 예수의 권능의 통하여,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그의 뜻을 궁극적으로 선포되게 하시며, 또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래하는 나라를 이미 현재에 현실이 되게 하심으로써 그 근본적이며 또 무조건적으로 속박하는 성격을 갖는다. 예수는 근본적인 반명제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의 해석을 전통에 의해서 해석된 성서의 계명에 대립하여 제기하며, 또 그의 권위 있게 선포된 해석은 그때마다 전통적인 계명을 능가한다.

– 하나님의 사랑과의 만남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에 관해서 말했을 뿐 아니라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서 이 아버지의 사랑이 현실이 되게 하였다. 예수와의 만남에서 얻은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이 예수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복종의 전제이며 가능하게 함이다.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환대와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일 수만 있고, 이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 하나님 나라와 상벌 관념

예수는 당시의 유대교의 보상의 관념들을 단지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관념들에 결정적으로 수술을 단행했다. 만일 예수가 보상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하늘에 있는 보화”, 즉 하나님 나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뿐이지 현세적인 보상이나 징벌로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금한다. 예수는 죄과의 업적, 상과 벌의 어떠한 청산도 알고 있지 않다. 예수가 보상에 관한 전통적인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는 요청이 그 진지함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예수의 인격적 주장

a) 예수의 행위들

우리는 복음서 속에서 소위 ‘자연 기적’에 관한 수많은 보도를 가지고 있지만 이 보도들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성에 관해서는 예로부터 의견들이 분분하며 이러한 보도들은 예수시대의 사람들이 구원의 신들, 황제 특정한 이교적인 구세주 형상들의 기적 행위에 관해서, 그러나 유대인 선생들에 관해서는 뭔가 다른 형식으로도 말했던 그들의 병행구들을 갖고 있으며 또 이 기독교 밖의 기적 사화와 복음서의 기적 사화에는 특히 구체적인 특징에서 무수한 유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논의할 여지가 없으며 무수한 기적사화는 예수와 그의 메시지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반면에 다른 보도들에서는 예수의 행위가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관한 논고를 위한 틀을 제공한다.

무수한 기적과 이적 사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제공할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다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그의 선포의 맥락에서 그의 행위들에 어떠한 의미를 주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한 예수는 어떠한 기적을 통해서 신적인 사명을 증명하는 일을 거절한다. 다만 예수는 사람들이 그의 행위들의 해석을 들을 수 없다고 확신할 때에는 언제나 능력 행사를 실행할 것을 거절한다.

b) 예수를 믿는 믿음

예수에게 있어서 믿음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이 그리로 나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도움에 대한 모험적인 신뢰이다. 그밖에 믿음은 예수의 기적 능력에 대한 신뢰일 뿐이라는 가정이 종종 주장된다.

비록 예수는 그의 인격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종말적인 주권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구원 행동이 실현되는 자신의 행동과 가르침과 믿음으로서의 만남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다.

c) 예언자 예수

예수가 예언자인 것은 복음서 속에 몇 군데 나오지만 모든 점에 있어서 예수가 결코 자기자신을 예언자로 의식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막 6:4, 눅13:33의 전통적인 표현들은 예수 자신의 언어사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증명해주지 않으며 또 나머지 전승도 예수가 스스로를 예언자로 묘사하는 어떤 독특한 진술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있어서 예언자의 시대는 세례자 요한으로서 끝났다는 것을 확신했다..

d) 메시야

유대교 안에서 구원을 가져오는 자를 기다리는 기대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태로 구별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1)다윗 가문의 왕인 메시야 2)아론 가문의 종말적 대제사장 3)하늘로부터 오는 “인자” — 이러한 기대는 유대민족의 정치적인 적을 분쇄하고 하나님의 죄없는 거룩한 백성을 다스릴 현세의 왕, 다윗의 아들,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희망으로 매우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e) 다윗의 아들

예수는 기다리던 정치적인 메시야에 붙여진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스스로 분명하게 거절하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종교적 의미를 거부했으며 그것은 메시야가 실제로 다윗의 주이며 그러므로 다윗보다 더 큰 분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정치적 희망을 성취해야 하는 다윗의 아들에 관한 기대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의미이다.

f)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공관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말속에는 대체로 찾아볼 수 없으나 마27:43의 “그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구절은 매우 특이할 만한 사실이며 그러나 이것은 마태의 첨가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 칭호가 유대 전승에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 증거 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기다리던 구원을 가져오는 자에 대한 유대적인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렀음을 안다. 그러나 예수는 이 기도용어를 그의 제자들에게도 가르쳤기 때문에 이 기도용어가 “나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의미될 수 없으며 또 그런 점에서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알았다는 언급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g) 인자

“인자”라는 칭호는 공관 복음서 속에서 자주 나올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속에는 오직 이 칭호만이 나타날 뿐이다. 이 칭호는 유래와 의미에 따라서 그 개념이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으며, 또 예수의 말속에는 쉽게 일치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개개의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일반적인 일상어이다. 만일 예수가 이 아람어 표현을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면 또 원시 공동체가 분명히 그것을 “사람”이라는 칭호를 가진 특정한 구세주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면 예수나 원시 공동체의 아람어 말속에 있는 그 표현의 이 의미는 “사람”이 유대교 안에서 특별한 상황에서 쓰여진 칭호로써 사용되었을 때만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그 사람”의 출현과 활동에 관해 말해졌고 이 때에 이 말을 들은 유대인은 종말적 구세주 형상이 중심된 문제임을 즉각 깨달았음은 분명하다. 이 인물은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오며 다윗적인 구세주와 같이 “그리스도”로 불려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종말적 심판자와 구세주의 명칭이다.

6. 예수의 고난과 죽음

예수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활동자로서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자로 스스로를 인식했으며,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과한 죽음에로의 길을 갔고, 또 그 점에서 그의 사명은 완성되었다. 예수가 회피하지 않는 그에게 부과된 죄인들에게 넘겨짐에서 예수 안에서 죄인을 찾으시며 또 배척에 부딪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다.

제2장 원시 공동체의 신앙

1. 부활절 신앙

예수는 그의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렵다. 그리고 가장 초기 전승은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고 이름하는 한 낯선 사람이 예수를 무덤에 장사했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다(막 15:43이하 병행). 이로써 예수의 활동은 실패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종말적인 구원을 역사 하신다는 그의 주장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 것처럼 보인다.

⒜ 바울의 보도

바울 자신은 기독교 공동체의 박해자로부터 부활하신 분의 선포자로 변신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하신 분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으며 그리고 모든 사도들도 그들이 부활하신 분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같은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살과 피”로 된 그의 지상적인 몸으로 보여졌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 마가복음의 보도

비록 예수의 빈 무덤의 발견이 본질적으로 그것 자체 이상으로 잘 증거되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을 보거나 복음서들 이외의 다른 신약성서를 볼 때 우리는 예수의 빈무덤이라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맨 처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가장 오래된 전승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전승은 예수의 죽음 직후에는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이, 그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부활하신 분으로 보았다고 보도한다. 베드로와 그 외의 증인들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죽임을 당한 자를 그의 생명으로 즉 신적인 종말시대의 생명으로 들어올리셨기 때문에 예수를 보았다고 확신했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수 없다. 부활 증인들의 이 목격(Sehen)은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구나가 참여할 수 있었던 사건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 부활 신앙의 본질

밖으로부터의 예기치 못한 개입을 통해서만 예수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이를 수 있었을 뿐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학자도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을 예기하지 못한 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확신을 갑자기 깨우친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했음을 확신해야 한다. 물론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물론 첫 증인들에 있어서 “이 목격(Sehen)은 믿음 안에서의 목격, 즉 믿음의 목격이었다. 분명히 믿음이 낳은 목격이 아니었으며 믿음을 낳은 목격, 믿지 못하는 완고하고 반항하는 마음들이 그 속에서 압도되어 버리는 목격이다”(H. Grass)

부활하신 분의 목격을 통해서 일깨워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의 부활을 믿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더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다시 죽을 수 있고 혹은 죽어야만 하는 지상적인 생명으로의 복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분의 올라가심을 믿는 믿음은 처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가 약속된 종말 때의 구원을 가져오는 자라고 정당하게 주장했음을 확신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은 부활하신 분이 곧 완전히 영광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를 강화시켰다.

2. 팔레스틴 원시 공동체의 그리스도 신앙

그들은 인간예수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이 인간 예수에 관해서 보도했기 때문에 이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진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자명하게 전제하지 않은 예수에 관한 보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를 일찍이 단순한 예언자로 보아야 했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은 예수의 행위와 예수의 말씀에 관한 보도를 이 믿음에서부터 형성했고 또 개조했다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예수의 생애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원시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죄과에 대한 대리적인 말살로서 이해했으며, 또 그 점에서 구약성서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3. 헬라주의 공동체의 그리스도 신앙

4. 교회의식

⒜ 원시공동체의 자기이해

원시 공동체는 스스로를 유대교 안에 있는 무수한 분파 집단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했는데,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의 부활을, 그럼으로써 기다리던 종말적 구세주가 도래했음을 증거할 수 있으며, 또 그러므로 그들의 민족을 하나님의 이 종말적 구원행동을 믿는 믿음으로 불러냈다는 점을 통해서 다른 유대인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원시 공동체는 자신을 새로운, 즉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창조된 종말적 계약의 지체들로서 이해하였다. 이 계약은 구원의 백성 전체를 이 계약 안으로 불러들이는 과제를 가졌다. 그러므로 원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백성을 포함해야 하는 새롭고, 종말적인 구원의 계약을 그들 가운데서 시작하셨음을 확신했다.

⒝ 유대 공동체로부터의 분리

원시 공동체는 유대인의 율법적 생활과 유대인의 종교 관습의 맥락 속에 아주 분명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해도 그들은 그들 주변의 유대교로부터 자신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로서 분리되었으며, 또 모든 이들은 이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오도록 부르는 사명이 위탁된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원시 공동체는 그들을 유대인 공동체와 분리시킨 또 다른 종교적 관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공동식사이다.

⒞ 열두 (제자들)과 사도들

제 3장 바울의 신학

1. 바울의 역사적 위치

⒜ 바울 사상의 영향과 유래

바울은 신학자였지만 선교사로서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적 사유는 언제나 그의 공동체들과의 대결에 의하여, 그리고 그 공동체들로부터 그에게 반향되는 탈선된 생각들과의 대결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의 숙고는 조직적인 서술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독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특정한 상황 안으로 써 보냈던 서신들 안에 보전되었다는 사실이 더 부가된다.

⒝ 자료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사상에 관한 매우 불확실한 견해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바울이 했다는 말속에서 여러 번 바울의 근본 사상과는 일치되지 않는 사상을 바울에게 돌리고 있는 사실은 물론 의심할 수 없다.

가장 분명한 것은 소위 ‘목회 서신들’ 즉 디모데와 디도에게 써 보낸 서신들은 나머지 바울 서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2. 구원 시대의 현재

바울은 당시의 유대교의 종말론적인 기대들을 물려받았으며, 그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원시 공동체의 신앙과의 관계에서 개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재적 종말 구원에 대한 신앙과 미래의 기다림이라는 상반되는 병렬이 생겨나게 하였다. 바울은 유대교로부터 “이 세대”와 “다가오는 세대”의 대조를 받아들인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현재의 악한 세대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위험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 이 세대를 극복하기 위해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에 근거하여 현 세대의 권세에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미 지금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살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세계사는 희랍인들에게서와 같이 반복하는 순환이 아니다. 그는 역사를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세계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신의 목표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으로 본다.

바울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의 행동의 모든 방향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사건은 옛날부터 계획된 종말 구원의 시작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지나가는 악한 세대는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옛 세대는 아직 존재하지만, 그렇지만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그의 본래의 기본 사상이 생겨난다.

3. 그리스도 사건

⒜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

바울이 창설하지 않았던 복음의 성격화는 하나님의 아들과 주(主)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존칭호가 나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묘사에서 그의 지상적인 혈통이 그의 하늘의 품격과 똑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바울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제 하나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권능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으며, 그럼으로써 어떻게 주로 고양되셨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 예수의 역사적 실재를 전 세계사를 포함하는 행동의 부분으로 보고 있다. 그 종말과 목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하늘로부터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서 그 완성을 찾는 것이다.

⒝ 예수와 그리스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두 개의 개념들은 아무런 신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라는 고유명사만을 홀로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드물며, 그리고 사용하는 경우에도 부활하신 분과 지상의 예수를 다같이 호칭하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예수”라는 말을 할 때, 그 이름은 그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분이신 인간예수의 인격에 대한 칭호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동등한 고유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그 특징과 방식으로 인하여 바울이 인간 예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마지막 인간”

바울은 많은 구절에서 인간 아담을 인간 예수에 대립시킨다. 만일 이러한 대립 설정에서 한 인간의 효력이 다른 한 인간의 복종의 효력에 비교된다면 그로부터 인간 예수는 이러한 비교에서 인간 아담과 같이 지상의 인간으로만 그렇게 단순히 불려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즉각 인식될 수 없으며, 이 본문의 서두에서 첨가된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아담에 대한 주는 어쨌든 그리스도를 “미래의 아담”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를 종말을 위하여 기다려지는 “사람”으로 특징짓고 있다.

바울은 하늘의 마지막 사람에 관한 신화를 전승으로부터 받아들였으나, 그 신화는 그가 지상의 혹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태를 사변적으로 서술하는데 쓰이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사람”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통하여 일어난 죽음의 극복과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그의 생명에 참여한다.

⒟ 主

바울에게 있어서 주(主)에 대한 칭호의 본래적인 의미는 바울이 그 자신을,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오직 이러한 주의 종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의 확신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주 그리스도에게 종이 되었으며, 이러한 현실로부터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주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뜻한다. 그러므로 주 그리스도에게 하는 신앙고백은 하나님 자신을 통하여 구원받았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 하나님의 아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전적인 인간성에 결정적인 가치를 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에 관한 이러한 말씀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태어나시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분은 또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행동하신다는 점이 중심이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와 화해하시고, 능력 가운데 그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하시고, 그의 아들을 바울에게 보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을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고, 그들의 마음에 그의 아들의 영을 보내시며, 그들에게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게 하신다.

⒡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어투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행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 향도하신다는 확신으로 인하여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어투를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어투는 하나님의 행동과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단독활동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어투는 아버지께 대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공동 소속감을 특히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그를 만난다는 사실을 굳게 확신해도 좋다고 언급하고 있다.

⒢ “하나님의 형상”

바울의 그리스도 선포는 본래의 의미에서 이해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진술을 하면 할수록 하늘의 형상에 대한 어떠한 사변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인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 신적인 구원을 선포하려고 한다. 반면 사람들은 바울의 그리스도 선포에 대한 그러한 이해에 반대하여, 바울은 인간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으며,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과 동일시 하며, 그러므로 예수의 인격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증명하며, 뿐만 아니라 선재에 관한 그의 진술과 부활하신 분의 기대되는 종말적 오심에 관한 진술은 사변적으로 표현되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 예수의 인간존재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 모방은 그리스도인들의 바울 모방에 병행된다.(고11:1, 살전1:6) :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을 권면합니다.”(고후10:1)는 분명히 예수의 지상적인 태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로마서 15:2-3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에게 유익을 주어 그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성경말씀에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내렸다’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결코 바울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해도 좋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그의 부활의 종국적인 사실에 그의 본래적인 관심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에서 권세들이 극복되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 활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의 선포의 본래적인 내용으로 표현한다.

⒤ 그리스도와 영

바울은 그리스도의 많은 활동을 영으로 소급한다. 또한 바울은 오직 성령에 관한 특징적인 진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며, 바울은 영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관하여 말한다. 영은 신앙 안에서 종말사건에 참여하였으나, 아직은 올리우신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현재에 있는 미래적인 구원의 현실을 아주 인격적으로 중계한다. 그리고 바울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영의 병렬은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 구원 시대의 시초에 일으키셨으며, 일으키고 계시며, 그리고 일으키실 그 구원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그리스도의 선재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실존에 관한 진술은 다소 “신비적”인 것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 그의 하나님께 올라가심, 영광으로 오실 그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대망과 그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회집에 대한 신앙고백일 뿐이다.

하나님 아들의 선재에 대한 그 신비적인 표현은 그의 실제적인 뿌리를 중심적인 신앙의 관심에 박고 있는 것이지, 결코 사변적인 호기심에 박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에 관한 바울의 진술 배후에 있는 신앙의 관심이 오늘날 우리들의 표상에 더 적합한 다른 형태로 진술될 수 있는가를 물어야만 할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하게 되었으며 또 모든 인간은 이 상황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바울은 그의 구원을 말함에 있어서 율법과의 대조를 말하고 그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 구원과 구속

바울은 그의 기록문서에서 구원에 대해 서술한다. 바울은 멸망해 가는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을 대조시킨다(고전1:18, 고후2:15, 빌1:18).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셨읍니다”(살전5:9).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박해 있는 구원이 되풀이되어 중심문제가 되고 있다.

바울은 미래적인 구원의 기다림에 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미래를 현재와도 밀접하게 결합시킨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래하는 구원이 이미 현재에 확실한 선물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과거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되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도래하는 세상의 종말에서 분명하게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그에게는 이미 현재적인 현실이다.

⒝ 영들의 세력들로부터의 해방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는 많은 주인들, 즉 죄, 율법, 원시 종교의 종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노예이며 그러므로 부자유하다. 이러한 무든 주인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자유하게 해 주셨으며, 또 해방시키실 것이다. 원시 종교 즉 영들의 세력들로부터 해방에 관한 진술이 가장 포괄적이다. 바울에 따르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게 하는 그래서 신적인 생활에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마귀들과 악마의 세력 밑에 어쩔 수 없이 서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부활로써 그 권세들을 무력하게 하셨다.

바울 서신의 많은 구절들을 읽어보면 사탄과 마귀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형상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이 온 세상의 상황을, 즉 온 세상의 궁극적인 운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마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속아서 그들이 알지 못했던 주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들의 힘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행동에 대한 신앙에 모호한 형태를 주는 것 같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항거와 악의 유혹적인 힘의 현실이 개개 인간들이나 혹은 개체적인 인간 집단에까지도 깊이 퍼져있으며, 개개 인간의 절망적으로 자신이 그 힘에 내 맡겨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악의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부정될 수 없다면, 악의 힘도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말미암아 그 핵심에 이르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권세의 제거에 관한 바울의 메시지는 신앙 안에서 인식된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상황에 굳게 결합되었다. 그러나 이 악의 세력의 멸망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바울의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더 중심적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 유대인으로서 바울에게 율법이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명령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은 율법은 인간을 감금하여 그 안에서 죄된 욕정을 일깨우거나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함을 주장하게 하며, 그래서 이 두 경우에서 인간을 원시 종교를 섬겨야 하는 종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울은 서신들을 통해 율법으부터의 해방을 말하고 있다(갈 3:21, 롬 3:20, 7:24). 율법으로부터의 속량은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믿음이 오기까지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끊임없이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갈3:10).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율법에 불복종한 인간이 받아야 마땅한 율법의 저주의 대리적 감수로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낮아지셔서 그 스스로는 받을 필요가 없는 율법의 저주를 대리하여 지심으로써 그는 저주의 힘을 부숴 버리셨으며, 인간을 속박하는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자유하게 하셨다. 율법의 지배 아래 종 되셨던 인간이 받아야 하는 본질적인 멸망은 율법의 저주, 즉 율법에 의하여 요청된 인간의 죄과 선고이며 그리스도께서 부여해주신 이러한 저주로부터의 자유는 그 본질에 따르면, 이러한 저주로 말미암아 통고된 죄과로부터의 자유이다.

⒟ 죄와 죄과로부터의 해방

바울은 인간에 대한 죄의 종 지배권을 세상 안에 있는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주로서의 율법과 밀접하게 결합된 것으로 본다. 바울은 죄를 첫째로는 인간이 종으로서 예속되어 있으며, 죽음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시행하는 세력으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종노릇에서부터 우리는 해방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으로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롬6:16)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불경건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살전5:10, 롬 5:6, 8).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 세력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대, 즉 종말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지만 여기서도 옛 시대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으며 죄의 세력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해당된다. 사실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의 절망적인 곤궁이란 죄가 인간을 몰아넣은 죄과라는 것을 보았다.

⒠ 의롭다함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논쟁적인 맥락에서 신적인 의인에 관한 이 복음을 가장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소위 로마서의 주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 바울은 믿음을 통한 의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메시지는 신앙이 깊은 아브라함의 모습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나서 그리고 아주 보편적으로 설명한다. 율법을 통함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는 과거 유대인으로서 흠없는 자신의 율법의 의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도록 배웠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난 후에 세 번째로 의인에 관해서 상세하게 말한다.

율법에 의한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 다시 말하면 믿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를 얻으려는 것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단지 “투쟁의 교리”일 뿐이며, 그러므로 그의 구원 메시지의 중심적 표현이 아닐 것이라고 자주 주장되는 견해는 바울의 서신들 안에서 이러한 교리가 차지하는 위치로 보아서 이미 견지될 수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의인론은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행동에 관한 바울의 복음의 근본적이며, 가장 개인적인 표현 형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바울의 구원론의 이러한 형태는 그의 역사적인 뿌리를 한편으로는 유대의 구원론과의 대결 안에 박혀 있다. 즉 기독교 이전의 마지막 세기의 유대교에 있어서는 구약성서적 사상을 수용한다.

–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드물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단순한 용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의인론의 맥락 안에서 그 합성어의 사용을 고찰하여 볼 때 이러한 합성어의 전승된 의미에서만 생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진술이다.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인간이 표상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은 행동하셨다는 것을 보도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를 요청하거나 참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행동하시는 눈으로, 의를 밝히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고 선고하는 하나님의 행동은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자가 되게 하며,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창조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가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뜻한다면, 우리가 이러한 신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와 의의 선고를 위한 신앙의 조건을 파악할 때에야 비로소 거기에 의도된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스도와 의인

바울은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시는 행동을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랑의 행동이라고 표현한다(롬 5:6, 8-9). 여기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였다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으로서 불경건한 이러한 본문에서 아직 이끌어낼 수 없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속죄의 제물”로 표현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통하여 일어난 죄과로부터의 인간의 정결을 생각하고 있다. 바울은 속죄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러한 대리적인 죽음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목적하려고 하셨는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속죄하시는 행동의 목표는 인류가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범한 죄의 용서이다.

– 믿음과 의인

바울은 하나님의 의인 행동에 대한 그의 진술에서 계속하여 이러한 행동이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된다고 지적한다(롬 1:16-17). 로마서 3장에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나 로마서 4장의 맥락에서는 벌써 “은혜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중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수정하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의 구원행동의 결과로 분명하게 이해한다. 믿음은 설교자의 설교와 보냄에 근거하여 완성된다. 즉, 설교를 강조한다.

그러나 바울의 의미에 있어서 믿음이 충분히 서술된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 본질상 한 사항에 대한 지적 승인이 아니라 복종이다. 믿음이 온전한 그리스도인 존재를 그렇게 복종으로 표현한다면, 동시에 믿음은 종말적 봄에 반대하여 잠정적인 것으로 제기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복음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는 구원의 복음과 마지막 날에 만났으며 그래서 이 복음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복종으로 붙잡힌 바된 인간의 응답이다. 믿음은 인간적인 업적 곧 “행위”가 아니라 “복종의 값없은 행위”이다(R. Bultman).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된 구원의 시대 안으로 자신이 들어서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구원받은 상태가 그가 그러한 믿음 안에서 살 때에만 그에게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인의 의인에 관한 바울의 복음은 옛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동안 시작되고 있는 종말 시대로서의 현재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또한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인의 의인에 관한 바울의 복음은 옛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동안 시작되고 있는 종말 시대로서의 현재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또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이미 일어났으며, 믿는 자에게는 받은 바 은혜의 선물로서 확실한 현재이다. 그러나 은혜로부터 떨어질 가능성은 상존하기 때문에(갈 5:4), 결국 하나님 앞에 흠없이 서기 위해서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 화해

바울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해방을 서술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 즉 화해에 관한 메시지가 더 언급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 표상을 두 번에 걸쳐서 상세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고, 그 두 번 모두가 의인사상과의 분명한 결합에서 사용되고 있다(롬 5:8-10, 고전 5:17-21, 롬11:15). 의인사상이 법률적 생활에서 나온 모습이라면 화해의 모습은 개인적인 이웃의 영역에서 유래한다. 화해는 인간들 사이에는 적대감이 상존이며, 이 적대감은 진노한 한쪽 편이 그 적대감을 묻어두고자 하는 포옹, 즉 스스로 화해하는 것을 통하여 지양되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는 적대감을 묻어두시고 화평을 세우셨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세우셨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으며, 또는 하나님의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의 필연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의 의미에서 화해는 의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야기될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분리를 하나님이 제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해의 이러한 개인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신적인 그의 주님께 대한 인간의 인격적 관계가 범죄한 인간으로 인하여 교란되었으며 또한 다시 정돈될 수도 없으나 이러한 무너진 관계가 하나님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어졌다.

바울은 화해에 관해서 오직 과거 동사의 형태로만 말하며 현재 형태로는 기껏해야 한 번 말할 뿐이다(롬11:5).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스스로 세상과 화해하시는 분으로서 행동하셨을 때에 화해는 맺어졌으며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 한 번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해에 관한 메시지 역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종말 시대에 믿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적 현실을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과거 안에서 현실이 된 하나님의 화해의 행동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