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잉게 숄
• 1917년 독일의 ‘잉거스하임-알텐뮌스터’에서 로베르트 숄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의 폭압 정치에 맞서 저항 운동을 펼쳤던 대학생 저항 단체
‘백장미’단의 리더 한스 숄의 누나이자 소피 숄의 언니이다.
뮌헨대학교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백장미’단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비인간적인 전쟁의 죄악상을 비판하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던 중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국민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형에 처해졌다.
‘국가반역죄’를 지은 자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잉게 숄을 비롯한 남은 가족은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나 전쟁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소설가, 교육가, 문화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잉게 숄은 20세기 후반을 ‘평화 운동’에 바쳤다.
1946~1978년 독일의 ‘울름 시민대학’의 교육을 주도했고,
1953년 남편 오틀 아이허와 막스 빌과 함께 ‘울름 디자인 대학’을 설립했다.
1998년 8월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백장미’단에 관한 수많은 책을 썼는데,
이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그 대표작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1년에 한스 숄(Hans Scholl)과 조피 숄(Sophie Scholl) 남매가 결성했다.
이들은 뮌스터의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가
나치의 안락사 정책(T-4 프로그램, 말이 안락사이지 사실상의 학살이었다)을 비판하는 강론을 듣고
충격을 받아 갈렌 주교의 허락을 받아 주교의 강론 전문을 전단으로 만들어 뮌헨 대학에 뿌렸다.
하얀 장미라는 단체의 이름은 스페인 소설 "하얀 장미"에서 따온 것인데
한스 숄과 조피 숄은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을 때 자신들의 이름을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유드 네보른과 안네트 둠바흐라고 말했다.
이후 한스 숄은 전단의 표제를 하얀 장미라고 붙였고, 곧 이 단체의 이름이 되었다.
이후 하얀 장미에는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를 비롯해서 뮌헨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인
알렉산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 빌리 그라프(Willi Graf), 크리스토프 헤르만 아난다 프롭스트
(Christoph Hermann Ananda Probst)와 그들의 교수였던
쿠르트 이포 테오도어 후버(Kurt Ivo Theodor Huber) 등이 가입하여 하얀 장미의 멤버를 구성하게 된다.
이들 중에는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귀환병들이 있었고, 조피 숄은 독일청년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의 인내와 정의의 정신하에서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나치가 패망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들의 전단은 주로 남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배포되었는데
이는 북독일에 비해서 남독일에서 반나치활동이 좀 더 활발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히틀러는 뭔헨 근처의 남독일에서 세력을 얻었다).
1942년 7월의 활동 이후 주춤하던 하얀 장미의 활동은 이후 다음해인 1943년 2월에 재개되었다.
이들은 2월 18일 마지막 전단을 뮌헨 대학의 수업 종료에 맞춰 공개적으로 배포하다
나치 당원인 뮌헨 대학의 경비에게 발각되었고, 숄 남매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 조직에 가담했던 다른 멤버들도 잇달아 구속되었다.
마지막 전단에서는 나치에 맞서 파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체포되어 인민재판소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다.
한스 숄, 조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검사보다 더 피고를 추궁하고 욕설과 모욕을 서슴치 않았던
나치의 악질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에 의해 단심제로 치러진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스와 조피는 재판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발언했으나,
프롭스트는 남겨진 갓난아기와 아내를 참작하여 재판장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사형은 선고된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두대(Fallbeil)로 집행되었으며,
한스 숄은 동부전선 참전 자격으로 총살형을 요구할 수 있는지 물었으나 거절당했다.
조피 숄은 그들이 공개처형(교수형)으로 나치의 선전도구로 사용될까 봐 걱정했으나
비공개 처형이란 말을 듣고 안도했다고 한다.
한스 숄과 조피 숄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각각
"자유여 영원하리" 와 "태양은 아직도 빛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다른 멤버들이었던 쿠르트 후버와 빌리 그라프, 알렉산더 슈모렐은
두번째 공판 이후 그해 여름까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가족도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심지어 전단을 인쇄하는것을 돕거나 멤버중 한명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까지 체포해
6개월에서 1년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하얀 장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은 극렬했다.
이 때 이들의 목을 친 사람은 전설적인 사형집행인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였다.
그는 수많은 목을 쳤으나, 미군정에 의해 사면되어 나치 전범들의 목을 쳤다.
라이히하트는 대대로 내려오는 사형집행인 가문의 자손으로,
죽는 날까지 이들의 목을 친 것에는 아무 감정도 없고 자기 할 일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쿠르트 후버 교수의 친구인 작곡가 칼 오르프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칼 오르프는 종전 직후 연합군에 전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자신이 하얀 장미의 창설 멤버중 한 명이었고 쿠르트 후버 교수와 친구였다고 주장해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칼 오르프는 하얀 장미의 활동과는 무관하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며,
심지어 오르프의 자식들까지도 아버지의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칼 오르프가 살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얀 장미의 활동을 이용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까지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백장미단 사건을 아는가? 역사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거나 한 두 줄 언급되는데 그치는 사실이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강렬한 충격과 전율로, 나아가 인생의 좌표를 결정짓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바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백장미단 사건이 그랬다.
백장미단 사건이란 나치 독일에서 뮌헨대학의 숄 남매(한스 숄과 조피 숄) 등 학생들과 쿠르트 후버 교수가 백장미단이라는 이름으로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갈망과 나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일깨우는 내용의 전단지를 작성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핵심 관련자들이 사형당했던 사건이다.
P.51-52
모든 독일 국민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시작하기를 기다린다면 그들의 만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히틀러에 대항해서 투쟁해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도시가 부서지기 전에... 우리의 마지막 젊은이가 피를 흘리기 전에..., 이 전쟁 기계가 전진하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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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숄이 처형을 앞두고 다른 수감자에게 한 말
“나는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의 행동이 몇 천 명의 사람들 마음을 흔들고 깨우칠꺼야. 틀림없이 학생들 반란이 일어날 거야.”
한스 숄이 교수대에서 마지막으로 외친 말
“자유는 살아있다.”
백장미단(白薔薇團, 독일어: Weiße Rose 바이세 로제[*])은 나치에 대항하여 뮌헨 대학교의 대학생들과 그들의 지도교수가 구성한 비폭력 저항 그룹이다. 1942년에 결성되어 1943년 2월까지 전단을 만들어 뿌리는 일로 나치에 대항하다가 여섯 번째 전단을 [[대학교]에서 뿌리던 숄(Scholl) 남매가 학교 경비에게 발각되면서 일원 전체가 사형당했다.
이들의 저항은 어쩌면 비현실적이고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나치 전체주의와 그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인 방법의 저항을 선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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