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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푸실 이야기/역사(신화) 이야기

토미리스(Tomyris),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를 죽이다.

Narin Pusil 2021. 4. 2. 20:36

스키타이(Σκὐθαι)족 일파인 마사게타이족(Μασσαγέται)은

고대 이란족의 유목연맹체이자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의 반농반목(半農半牧) 집단이었다.

마사게타이 여왕. 토미리스(Tomyris)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가 마사게타이 정벌 당시 그녀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고, 그녀의 아들이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한 것에 격분해 토미리스 여왕이 키루스 2세를 죽여 피가 가득찬 주머니에 그의 머리를 담갔다고 전한다.

토미리스와 그녀의 아들로 마사게타이의 군사령관이었던 스파르가피세스(Spargapises)의 이름은 이란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헤로도토스를 비롯해 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기록한 이들이 모두 그리스인 역사학자들이었으므로 토미리스의 이름도 그리스식으로 발음된 이름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많은 그리스 역사가들은 그녀가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창시자로써 그녀의 나라를 정복하려 했던 키루스 대왕을 죽이고 효수했다고 기록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경 - 425년경)는 토미리스가 살았던 시절보다 거의 100여 년 뒤에 살았으며 그녀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한 최초의 고전 작가였다.

 

토미리스의 역사는 서구 사회에서 널리 알려졌고 전설이 되었다. 이후 로마의 스트라보, 폴리아에누스, 카시오도루스 그리고 요르다니스 또한 토미리스에 대한 글을 썼으며, 그 기록은 《게타족(고트족)의 기원 및 습속》(De origine actibusque Getarum)에 남아 있다.

 

그리스 역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남편인 마사게타이의 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키루스 2세가 구혼 요청을 빙자해서 사신을 보내자 마사게타이의 왕위를 노린 것을 알아채고 거절했다. 이에 키루스가 마사게타이를 여러 차례 공격하면서 아락세스 강을 건널 다리, 뗏목, 탑 등을 만들었다.

토미리스는 마사게타이를 시험하는 것이라면 자신들이 강에서 3일 거리만큼 물러날 것이니 건너오라고 하면서 그대(키루스 2세)의 나라에서 맞이할 것이라면 그대가 3일 거리만큼 물러나라고 제안한다. 이에 키루스는 고민을 하게되고 크로이소스의 제안대로 마사게타이로 넘어가기로 결정한다. 키루스 2세가 강을 건너기로 하자 토미리스는 약속대로 군대를 3일 거리만큼 물러났다.

크로이소스는 또 넘어가서 하루 거리에 부대의 일부만 주둔 시키고 그곳에 산해진미와 포도주를 쌓아두도록 하고 강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키루스에게 조언한다. 이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고 물러나자 토미리스의 아들이 이끄는 부대가 공격하여 키루스의 남겨진 부대를 도륙하고 남겨진 포도주에 취해 잠자던 중 포로가 된다.

키루스에게 아들인 스파르가피세스를 사로잡히자 토미리스는 아들을 돌려준다면 아무런 대가없이 나라를 떠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태양신의 이름으로 그대가 좋아하는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키루스를 죽이다


키루스에게 포로가 된 스파르가피세스는 키루스에게 묶여진 몸을 풀어줄 것을 애원했고, 이에 키루스는 스파르가피세스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포박을 풀어주자 마자 자살해 버리고 만다. 이에 광분한 토미리스는 페르시아군을 공격했고 다수의 공방(헤로도토스는 이 전투가 비헬라스인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중 가장 치열한 전투라고 했다)을 거치며 전투를 이어나가던 와중에 결국 토미리스가 승리 하게 되었다.

토미리스는 온 사방을 뒤져 키루스의 시신을 뒤져 찾아냈고 가죽 부대에 사람의 피를 가득 담은 다음에 키루스의 머리를 가죽 부대에 담그면서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계략으로 내 아들을 사로잡으면서 나를 망쳤지만, 하지만 나는 위협했던 대로 그대가 피에 물리게 해줄 것이오" 라고 했다.

실제 이름은 불분명하고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지어낸 이름이며 이 때의 키루스 2세의 죽음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헤로도토스는 이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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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JvARHSpnC4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토미리스는 대초원을 정복하려던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를 죽인 스키타이 족 일파 마사게타이족의 연대적으로 부족 연합이자 세계 최초의 여왕에라고 전해진다.  카자흐스탄 유명한 감독 아칸 사타예브는 토미리스에 대한 자전적 시나리오로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의 대본을 만들면서 "이 민족간 투쟁은 가장 잔인한 행위로" 간주했던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작품을 사용했다. 토미리스 여왕이 키루스 2세를 죽여 피가 가득찬 주머니에 그의 머리를 담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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