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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는 상(商)나라와 밀접한 예맥족이 만든 ‘동이사(東夷史)’다” 《東夷 한국사》

Narin Pusil 2023. 7. 16. 16:00

 

'화하'와 '동이'가 구별되어 있는 것을 중국 지도에서 볼 수 있다. '동이'영역에 홍산(용산)문명을 일으킨 '치우'영역도 보인다. 은나라를 섬기던 화하영역에 '주'나라가 어지러운 정사를 펼치던 마지막 수도를 '은'으로 정했던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상'나라 지배층은 동쪽으로 쫓겨가 '동이'영역을 세우고 화이'족, 주나라와 대결한다. 물론 요하지역과 지금의 만주지역 그리고 한반도까지 이동했던 무리도 있다.

 

BC1046년경, 기자는 주나라를 떠나, 형제국이었던 고죽국(한서지리지)으로 가 상나라를 계승한다. 그러자 단군조선은 밀리게 되고 수도를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긴다.『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1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요(堯)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리기를 1,500년이 되어 주(周)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 1,908세였다(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都平壤城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又名弓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단군이 최초로 정한 도읍은 평양성이고 뒤에 아사달로 옮겨 약 1,5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주의 무왕이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함으로써 단군은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장당경은 세 번째 도읍이다. 장당경으로의 천도는 단군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고조선내에 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ㅡ 물론 청동검은 요하 서쪽 건너편에서 들어 온것으로 보이지만, 요하를 경계로, 고인돌은 고조선 지역에만 있다. 고인돌, 즉 강력한 부족의 지배자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ㅡ소위 중국 최초의 국가라는 위의 그림과 같이 상(은)나라는 요서지방(고죽국)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내려와 마지막 수도였던 "은"을 중심으로 가장 넓은 땅에 '상'나라를 세웁니다. 그때 '주'나라는 변방의 역소국이었습니다.

 

주나라가 멸망시킨 상나라에서 온 유민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 단군조선과 동족이다.

 

■예맥(濊貊)은 한반도, 만주, 연해주, 산동, 요서, 요동 등지에 걸쳐 거주하던 민족이며, 한반도 중남부에 거주하던 부족 연맹체, 진국(辰國)의 진한(辰韓)족과 함께 현대 한민족의 직계 조상이 되는 고대 민족이다.

■북방의 <맥>족과 구별짓는, 남방의 <예>족인, <왜>는 한반도에서 밀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조의 위(曹魏, 220 ~ 265) 나라 시절의 지도다.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정사(正史)라면, 일본사는 패사(稗史)다.
ㅡ 식민사학보다는 훨씬 귀 기울이게 되는 <새로운 사관(史觀)>에 속고 싶습니다.  
     고사기-일본세기등에 근거한 일본사의 황당무계보다는 ,
     증거자료에 의한 너무 신선함에 속아 넘어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또한, 불의한 역사관으로 무장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할 유일한 대한의 역사관입니다.

 
 
 
①중원문명의 창시자인 동이(東夷)와 한국과의 관계,
②한반도와 왜의 실체,
③백제의 중원 점령 배경 등,
④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국 고대사의 많은 미스터리를
⑤실증 자료와 논리를 토대로 명쾌하게 풀어 낸 책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고대사 상식(常識)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인이 신라의 후손이라면,
    단군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 존재가 증명된 최초의 왕조인
    은나라(상나라, BC 16세기~BC 11세기)에서도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는 낙랑의 후손이라 주장했었는데,
    낙랑은 요서에서 이주한 기자조선의 후손이고,
    기자조선은 중원의 은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은나라(상나라)와 관련이 깊은 맥족과 예(부여, 왜)족,
    그리고 중국 동부(산동)의 만이(蠻夷)로 불리던 구이(九夷) 세력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예맥족(해모수 세력)과 구이족(하백 세력)의 연합국이다.

㉰백제는 처음 한반도 주인인 (왜, 부여, 온조왕 백제)에서
    한(漢, 대방, 초고왕-백제)으로, 다시 동쪽 예(동예, 동부여, 왜, 비류왕-백제)로,
    북부여(근초고왕-백제)로, 또다시 중원의 주인이던 연나라(모용 선비국, 동성왕-백제)로
    지배층이 바뀌다가 마지막에 모용 선비계(동성왕계)를 벗어나
    북부여를 회복하려다 멸망한(성왕-백제) 다문화, 다국적 국가이다.

㉱왜(예, 일본)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BC 3세기 한반도의 대혼란을 피해 일본열도로 이주한
    한반도계 청동기인들(야요이인)이 세운 나라로,
    BC 10세기 이후 만주와 한반도의 민무늬토기 세력(예족, 부여족)이
    중국 연나라, 제나라, 맥족(기자조선, 낙랑)의 지속적인 공격에 밀려
    한반도 남부를 거쳐 정착한 나라이며,
    서쪽에서 밀려오는 연나라, 맥족 세력(기자조선, 한군현)에 대항하여
    만주, 한반도에서 끝까지 싸우다 결국 일본 열도로 축소된 나라이다.
 
 

 

“한국사는 상(商)나라와 밀접한 예맥족이 만든 ‘동이사(東夷史)’다”

기사입력 2014-11-06 
‘동이 한국사-한국 고대사의 모든 비밀’ 펴낸 이기훈 “한·중·일은 같은 뿌리”
한국의 상고사를 되찾아온 ‘동이 한국사-한국 고대사의 모든 비밀’의 저자 '이기훈' 교사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9:40).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1980년대 대학가 써클(동아리)에서 흘러나온 성경 구절이다.
당시 서울의 대학가는 학생들이 던지는 돌과 전투경찰이 쏘아 대는 최루탄으로 만날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지식인과 언론이 침묵하는 공간에 대학생들이 던지는 돌들이 민주주의를 절규한 셈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지금 그런 판국이다. 다른 분야는 그럭저럭 일제 식민지배를 벗어났는데 유독 역사학계는 요지부동이다. 왜일까. 자기부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학을 공부하고 퍼트린 선대 사학자들의 한계와 원죄를 털어내지 못한 채 ‘∼학파’니 ‘∼인맥’이니 하는 실증사학에 매몰돼 스스로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부정하는 왜곡된 역사관을 고수하고 있다. ‘정통사학’ ‘강단사학’이라는 말로 되레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여기에 반대하거나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면 ‘재야 사학자’ ‘역사학계 이단자’로 취급받는다.
 
ㅡ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 주변국가들 지도. 만주 일대가 고구려 영토였음이 훤히 드러난다.
 


이런 참담한 역사학계에 강력한 이단자가 나타나 돌을 던지고 있다. 이름은 이기훈 교사.
연세대학교와 북경어언(語言)대학교 대학원을 나와 현재 서울 명덕외국어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북경대 사학과 출신 정룡(程龍) 교수의 지도로 ‘은상문명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이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하지만 아직 박사학위가 없으니 강단 사학자들이 말하는 정통 사학자는 아니다.

이기훈은 중국에서 고대 한자인 갑골문을 연구하던 중 한국 문화와 갑골문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현대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갑골문 속 문화현상을 오히려 한국에서 쉽게 찾곤 했는데,
이러한 뜻밖의 사실로 우리 한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연구 끝에 갑골문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을 쓰기도 하고,
이번에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민족적 갈등을 풀고자 하는 염원으로
한·중·일의 고대사를 깊게 연구하여
‘동이 한국사-한국 고대사의 모든 비밀’(책미래)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중국 역대 정사인 ‘24사’ 중 ‘동이전(東夷傳)’을 번역하고, 한국 측 사서와 비교해 한국 고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 책이 바로 이기훈이 기존 사학계에 던지는 돌멩이다. 저자는 중원문명의 창시자인 동이와 한국과의 관계, 한반도 왜(倭)의 실체, 백제의 중국 중원 점령 배경 등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국 고대사의 수많은 미스터리를 실증 자료와 논리를 토대로 명쾌하게 풀어냈다.

저자는 한국사가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 중심의 국가사가 아니라, 고대 중원 문명의 창시국 (商)나라와 관련이 있는 예맥족이 만든 역사, 즉 ‘동이역사’라고 보고 이런 관점에서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다음은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고대사 상식’이다.
 
 
①“한국인이 신라의 후손이라면 단군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 존재가 증명된 최초의 왕조인 나라(상나라, BC 16세기~BC 11세기)에서도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는 낙랑의 후손이라 주장했었는데, 낙랑은 요서에서 이주한 기자조선의 후손이고, 기자조선은 중원의 은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②고구려는 은나라(상나라)와 관련이 깊은 맥족과 예(부여, 왜)족, 그리고 중국 동부(산동)의 만이(蠻夷)로 불리던 구이(九夷) 세력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예맥족(해모수 세력)과 구이족(하백 세력)의 연합국이다.
 

백제는 처음 한반도 주인인 예(왜, 부여, 온조왕백제)에서 한(漢, 대방, 초고왕백제)으로, 다시 동쪽 예(동예, 동부여, 왜, 비류왕백제)로, 북부여(근초고왕백제)로, 또다시 중원의 주인이던 연나라(모용 선비국, 동성왕백제)로 지배층이 바뀌다가 마지막에 모용 선비계(동성왕계)를 벗어나 북부여를 회복하려다 멸망한(성왕백제) 다문화·다국적 국가이다.


왜(예, 일본)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BC 3세기 한반도의 대혼란을 피해 일본 열도로 이주한 한반도계 청동기인들(야요이인)이 세운 나라로, BC 10세기 이후 만주와 한반도의 민무늬토기 세력(예족, 부여족)이 중국 연나라, 제나라, 맥족(기자조선, 낙랑)의 지속적인 공격에 밀려 한반도 남부를 거쳐 정착한 나라이며, 서쪽에서 밀려오는 연나라, 맥족 세력(기자조선, 한군현)에 대항하여 만주, 한반도에서 끝까지 싸우다 결국 일본 열도로 축소된 나라이다.”

독자들은 ‘동이 한국사’를 통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우리의 고대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접할 때 가장 흥미를 끌었던 점은 저자가 중국의 명문대학인 북경어언대에서 고대 한자(갑골문)와 한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주제로 논문을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재야 사학계 일각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일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구체적 실증이나 학계의 인정 없이 이루어지고 있어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한자와 한국과의 관계를 증명하고, 또한 그 원인을 파헤쳐 한 권의 책으로 편찬했다. 역사학계 특성상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분들은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당돌한 주장’에 당황하여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그동안 품었던 고대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을 실증 자료와 논리로 당당히 펼쳐 나가는 저자의 필치에 박수를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독자들의 반응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한편으로는 한국 측 사서들의 ‘사실 엄폐’ 내지 ‘사건 암시’를 신랄하게 파헤쳐 그동안 한국인들이 알고 있던 역사적 지식을 송두리째 바꾸려 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이 한반도 역사를 마치 ‘중국의 아류사’ 쯤으로 여기는 오만을 불식시키고자 노력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어찌 보면 아군 없는 외톨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강단 사학자들이 정해 놓은 역사의 틀과 배치되고,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도 배치되며, 한국뿐 아니라 중국·일본 어느 나라 학자도 쉽게 이 책의 내용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많은 ‘아군’이 생긴다면 이 책의 가치는 과거 어떤 역사서보다 의미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동북아시아 3국(한·중·일) 간에 일고 있는 현재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 삼국이 공동의 운명을 지닌 역사 공동체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향후 삼국 국민 간의 서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와 보다 열린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책을 먼저 접한 독자들의 댓글도 도발적이다.

“동북 3국의 역사를 충분히 뒤바꿔놓을 책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동북 3국이 이 책을 가지고 토론할 날이 멀지 않았다.”(happykh1816)

“고대의 역사는 동이족과 화하족의 싸움이었다. 북방 민족 역시 동이족에 속했으며 동이족의 흐름을 알면 우리나라 역사와 중국 역사를 큰 틀에서 파악할 수 있다.”(aaaa123krkr)

“그동안 알고 있던 한국사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이네요. 한국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의 해석을 제시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해줍니다.”(dante27)

“엄청났다. 그냥 엄청났다. 유익함과 재미를 떠나 세상에 파장을 가져올 책이다. 역사를 다시 검토하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진 책이다.”(billylim98)

“백제가 중국을 지배했다? 윷놀이의 기원이 한국이라는 증거는 한자?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았던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게 되었다.”(5pingpong)

“역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쓰셨다는 게 정말 새로웠습니다. 그동안 읽어왔던 역사서와는 달라 더욱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꼭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입니다.”(jennylee98)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東夷는 中原 문명의 주인공
 

 
상나라(은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갑골문에 기록된 동이(東夷)의 글자 형태. 이(夷)는 오랑캐가 아니라 큰 대(大)와 사람 인(人)으로 이루어진 대인(성인)의 의미였다.

  —‘동이’라고 하면 단순히 중국인들이 우리를 낮추어 부르는 용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초의 한자인 갑골문을 분석해 보면 동이(東夷)라는 말의 원래 뜻이 ‘해 뜨는 곳(東)의 큰 사람(大人)’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갑골문을 만든 3000여 년 전 상(商)나라(은나라) 사람들 역시 동이 사람들이었음은 중국과 한국 학계에서 이론 없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이와 수천 년 동안 전쟁을 해온 중국 서쪽 내륙 사람들은 이 동이를 ‘적(敵)’ 혹은 ‘야만인(오랑캐)’이라는 뜻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에서는 동이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된 것이죠. 최근에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중국 최초의 문명을 이들 ‘동이’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동이 문명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의 동북아시아에는 어떤 문명이 있었나요.
 
  “8000년 전 한반도 곳곳에서 발해만 유역(대릉하, 요하유역) 동이 문명의 특징인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하고 본격적인 신석기 혁명이 시작됩니다. 또한 이 시기를 시작으로 한반도에 발해만 유역의 북방식 문명이 퍼져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앞선 신석기 유물은 북경 근처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중국 신석기 문명이 황화 문명의 시원지인 황하 중류(중원)보다 북부 발해만 유역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교사는 “이후 동이인들은 중국 내륙 문명과 구분되는 문명을 창조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북신문화(BC 5300~BC 4500)’ ‘대문구문화(BC 4300~BC 2600)’ ‘용산문화(BC 2800~BC 2000)’”라고 설명했다.
 
  “이들 문화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이 문화권에서 발전하다가, 이 문명의 후기에 속하는 용산문화(龍山文化)가 약 4800년 전 발생하여 그 영향 범위가 해안 지역을 넘어 중원 내륙까지 퍼집니다. 이 문명이 퍼지기 전 중원 내륙에는 중국 신석기 문명인 앙소문명(BC 5000~BC 3000)이 있었는데, 용산문명이 이 문명을 정복하면서 동이계 문명이 중국 내륙 깊이 들어서게 됩니다.”
 
  —본격적인 중원문명의 발전도 동이족이 이룬 용산문화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동이족 황제 치우(蚩尤)가 바로 용산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기》에 중국인들이 시조로 여기는 황제(皇帝) 헌원과 치우가 전쟁(탁록대전)을 벌였는데, 중국에서는 이 전쟁을 BC 2600년 전으로 계산합니다. 이 연대는 용산문명이 시작되고, 치우가 다스린 시기와 대략 일치합니다. 치우가 중원을 점령할 때 중원 사람들은 ‘치우가 머리는 구리, 이마는 쇠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치우가 거느린 구려(九黎)족이 당시 중원 내륙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청동기를 소유한 발달된 문명이었음을 뜻하는 겁니다.”
 
 
  中原을 점령한 東夷族 商나라
 

ㅡ상나라가 멸망할 당시(BC 11세기) 기존에 없던 상나라계 청동기가 분포한 요서 지역. 이는 상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상나라의 주요 세력이 중원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했음을 뜻한다.

 
 
이 교사는 “이후 북방에서 남하한 구려 사람들이 중원을 점령하고 동이문명(용산문명)을 창조한 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문명이 점차 동서로 분단되고, 황하 중류 지방에 하(夏·BC 2070~BC 1600)왕조가 들어서면서 중국 대륙에는 동서 간 다른 정치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고 말했다.
 
  이 교사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라는 왕조 건립 후에도 동방의 동이족에 지속적으로 시달렸고, 결국 북방 동이계 상(商)족에게 중원(황하 중류)을 빼앗겼다. 이 상족이 세운 상나라(은나라)가 중국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중국 최초의 왕조다.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殷·은허)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고도 부른다. 상나라, 즉 은나라 사람들이 북방 동이계라는 것은 중국 학계가 공인한 사실이고, 고고학적으로도 확인이 된다. 상나라 시기 문화적, 철학적으로 대대적인 발전을 이루며 한자(漢字)의 모태인 갑골문을 만들었다.
 
  상나라가 세워지는 BC 16세기 무렵 중국 동부 지역은 치우의 구려국 문명인 용산문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동이가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화하계인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다시 회복하는 시기인 BC 1046년까지 600년 동안 중국의 문명은 커다란 동이 집단인 내륙의 상족과 그들과 대립관계를 보이던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의 동이(구이)에 의해 주도된다.
 

 
 
  商유민들의 고조선 귀환
 
  —《사기》에 따르면 상은 주나라(BC 1046~BC 256)에 멸망했는데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됩니까.
 
  “《사기》에 보면, 상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주나라의 통치를 피해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가거나 강제로 이주를 당했는데, 이들이 이주해 간 지역은 주로 자신들과 문화적 혈연관계가 깊었던 중국 동북 지역, 즉 (고)조선 땅이었습니다. 이는 상나라 멸망시기인 BC 11세기경 제작된 상나라 계열의 유물이 고조선이 있던 요서 지방에서 대거 발굴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서에 ‘기자(箕子)가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키는지요.
 
  “그렇습니다. 상나라 유민들이 이주한 곳이 바로 북경 부근에서 동쪽으로 요하 부근에 걸친 고조선 지역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땅으로 되돌아간 것이죠. 상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이곳은 독자적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가 있었는데, 이 문명이 바로 고조선 문명이라고 여러 학자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나라(은나라)의 한반도 이주를 짐작게 하는 점치는 뼈(복골): 소나 양 등의 넓은 어깨뼈에 흠집을 내고 점을 치던 풍습은 처음에 발해만 북부에서 발전해 중원으로 내려간 뒤 다시 한반도, 일본으로 전파된다. 이를 통해 동이 민족의 이동을 짐작할 수 있다.
①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되는 BC 23세기 시작된 하가점하층 문명 지역(요서 지역 건평)에서 발견된 점복용 뼈.(요령성박물관)
② 상나라(은나라) 시기(BC 16세기~BC 11세기) 중원에서 사용된 점복용 뼈.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 고조선 지역에서 황하를 타고 남하한 사실을 증명한다.(은허박물관)
③ 삼한시대에 한반도 남서부(전남 해남 군곡리)에서 사용된 점복용 뼈. 상나라의 이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국립중앙박물관)
④ 삼한시대에 한반도 동남부(부산 기장)에서 사용된 점복용 뼈.(국립경주박물관)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의 병립
 
  —오늘날 출간되는 많은 역사서에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면서 단군(檀君)조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기자조선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나라에 쫓겨난 이들 상족 세력이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에 있는 대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이루게 되자, 기존의 고조선, 즉 단군조선 세력은 요하 동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대체한 게 아니라, 기자조선과 단군조선 세력이 별도로 존재한 것입니다. 물론 같은 시기 중국 대륙 동쪽인 산동반도는 여전히 동이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사는 “하지만 철저히 동이와 원수로 지냈던 화하족은 상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으면서도 역사를 자기들 중심으로 기술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상나라를 제외한 중국 동부의 동이 역사는 소멸되거나, 화하족 역사로 편입 혹은 왜곡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말했다.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을 분석하면 결국 상나라 유민이 세운 기자조선은 요하 동쪽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곧 요서지방의 동이계 정치체와 요동과 한반도에 다른 정치체가 존재했다는 의미입니다. 만주 요하를 기준으로 문명이 나뉜 셈인데 이 두 세력은 결국 BC 6세기경부터 스키타이 문명의 침입으로 하나로 섞이게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요.
 
  “이는 이 시기 북방계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은 비파형 동검이 요서 지방에서 점차 동쪽인 요동과 한반도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스키타이는 BC 7~8세기 북방 유목민족이자 발달된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북방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유목 기마민족화를 이룩한 북방 유목민족입니다.”
 
  —요서의 기자조선과 동쪽에 있는 고조선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나요.
 
  “기자조선은 서쪽의 연(燕)나라 및 중원 제국과 긴장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동쪽의 조선과 다툴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비파형 동검이 퍼지던 시기에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이라는 두 정치체 간에 군사적 문화적 연합이 공고해졌다고 보는 게 순리적입니다. 중국 사서에서 이 두 지역 사람들을 ‘예맥족(濊貊族)’으로 통칭하고 있는데, 이는 예족(단군조선)과 맥족(기자조선)이 서로 화합해서 살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왜), 맥, 한으로 구성됐던 고조선
 
  이 교사는 “하지만 이런 동북아 정세는 연나라가 고조선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BC 3세기부터 또 한 번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BC 3세기 연나라의 조선 공격으로 요서 지역에 있던 맥족(기자조선 세력)이 대거 한반도 북부와 요동 지역의 예족 땅에 진출하면서 그 지역 사람들을 ‘예맥’으로 불렀고, 맥족이 동진해 오면서 요동에 있던 예족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한’과 섞이면서 ‘한예’ ‘왜한’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교사는 “이 무렵 중국 측 기록에 예(만주), 맥(요동, 한반도 북서부), 왜(한반도 동부, 남부), 한(한반도 서부, 남부)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과거 조선을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했거나 적어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연나라의 침입이 고조선과 한반도의 판세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거네요.
 
  “《삼국지》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해 조선 땅 2000여 리를 취했다’고 나옵니다. 이때 연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서쪽 맥족 계열의 조선(기자조선)이 큰 피해를 입고 그 유민이 요동과 한반도로 대거 몰려들게 됩니다. 오랫동안 중국 대륙에 있던 ‘조선(기자조선)’이 한반도로 직접적으로 쫓겨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한반도에 정착한 세력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한반도에는 이미 BC 7~6세기에 한 차례 북방 동이계(예계, 왜계) 사람들의 유입이 있었습니다. 이후 앞서 말씀드렸듯이 BC 3세기에 연나라의 요서 침략으로 인해 조선(맥-흉노계의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한반도 이주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 요서 지역에서 한반도 서북부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상나라, 스키타이와 관계 깊은 중국 북방민족인 흉노계(맥계) 사람들로서 이후 낙랑, 백제, 신라 등지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합니다.”
 
 
 
 
‘倭’는 일본이 아닌 ‘예’, 즉 ‘부여’
 
  —‘예족’을 ‘왜족’이라고도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한반도 고대국가 동예의 예(濊)는 ‘부여’와 같은 말이자 지금은 고대 일본의 국호로 사용하는 ‘왜’와도 같은 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족(부여족, 왜족)은 맥족이 유입되기 이전 이미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했던 동이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고대사서와 유물로 증명이 됩니다. 왜족(예족)이 한반도에 있었던 가장 명확한 기록은 《후한서》에 ‘삼한(마한, 진한, 변진)은 동서에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고 남쪽에는 왜와 접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한국(삼한)은 동쪽과 서쪽 바다가 경계인데 남쪽은 바다가 아닌 ‘왜’국과 붙어 있다(接)는 말입니다. 이 ‘왜’는 한반도 원주민인 단군조선, 즉 예족(왜족)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북방의 혼란에 밀려 한반도 남단까지 축소되어 한반도 남부와 동부에 수많은 소국을 세웠는데 이들이 바로 ‘왜’입니다.”
 
  —왜가 BC 3세기 이전 한반도에 먼저 정착했던 북방 부여계라는 주장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왜’를 ‘예’로 발음했는데(일본어론 이에), 이는 왜와 예가 예족, 즉 부여족 사람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던 고유어였음을 뜻합니다. 저는 예(왜)를 ‘해’(日·일본어로 ‘히’)로 해석합니다. 예는 한반도로 유입된 북방 맥족(고조선, 낙랑, 마한)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 원주민인 예족(부여족) 사람들인데, 한반도 동부(동예)와 남부(가야)와 일본 서부(왜) 사람을 통칭해서 부른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교사는 “BC 3세기는 일본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라며 일본은 이 시기부터 오랜 신석기시대를 마감하고 청동기시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최초의 청동기 문명이 시작되는 곳은 한반도 남부와 가까운 구주(九州·규슈) 북쪽 지역입니다. 당시 연나라에 밀린 요서 지역 기자조선 유민들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들 기자조선 유민에 의해 밀려난 예맥족(왜족)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초의 청동기 문명인 야요이문명을 창조하게 됩니다.
 
  야요이인들은 한반도 남부 사람들과 유전적으로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이는 야요이문명이 예맥족(왜족)이 이주해 만든 문명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신석기시대 남방계 원주민을 몰아내고 현재 일본의 주류 민족이 됩니다.”
 
  결국 연나라의 대규모 침입은 고조선 연맹의 핵심 지역인 요서 지역의 동이 세력을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요서 지역 사람들과 한반도 북부와 요동에 있던 단군조선 세력(진조선, 부여, 예, 왜)까지 한반도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다시 일본 열도로 건너가면서 일본의 고대 문명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倭’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확장
 
  이 교사는 “결과적으로는 한반도가 고조선 문명의 주요 계승자가 되었다”며 “요동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남하한 예인들은 이후 한반도의 예맥국인 한(韓)과 연합해 삼한을 정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고대 역사서에 ‘한’과 ‘예’를 하나로 묶어 ‘한예’로 부르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오히려 과거에 한반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임나일본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왜는 사실 열도로 건너간 후의 왜가 아니라, 당시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토착 동이족 세력(예족)으로 봐야 합니다. ‘왜’라는 의미도 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그냥 한자로 음차한 것일 뿐이고, ‘태양’이란 뜻입니다. 저는 이 ‘예’나 ‘왜’의 기원을 ‘해(일본어로 히)’의 색깔인 흰색을 숭배한 상나라(은나라)로 보고 있습니다. 상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상나라’ ‘은나라’ 이렇게 부르지 않고 ‘위(衛·웨이)’ ‘의(衣·이)’로 불렀습니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유민이) 조선으로 이주한 뒤 이 ‘왜’는 점차 요동(예·부여), 한반도(동예·왜=가야), 일본(왜)으로 이주하면서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따라서 초기 일본의 역사는 일본에서 한반도 쪽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 교사의 설명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사 초창기의 이야기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열도에 건너간 이후 자기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자기들이 당한 것을 빼고, 거꾸로 한반도를 침략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왜의 성격을 알면 임나일본부를 가지고 일본과 다툴 필요조차 없습니다.”
 
 
  한국에 남아 있는 東夷 문화
 
 
ㅡㅡ 중국 국무원에서 2009년 출간한 권위 있는 역사서 《중국역사상식》에 그려진 동이와 화하의 영토. 한국 사학계에서 설정하고 있는 동이 영역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이 동이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서부와 남부의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 평야 지역이 동이의 활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동이족이 한반도로 유입된 과정과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결과적으로 고조선 동이계의 문화를 계승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그동안 한국 학계는 동이의 영역을 굉장히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그냥 짐작만 하지 정확하게 그 실체를 알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국 국무원에서 2009년 출간한 《중국역사상식》에 그려진 동이와 화하의 영토 지도를 보면 동이의 영역이 한국 사학계에서 설정한 것(산동반도)보다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실제 화하족이 살고 있던 서쪽 사막 지역이나 묘만족이 살던 남쪽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평원 곡창지대가 동이족이 살고 있던 땅입니다.”
 
  —한국 사학계나 중국 학자 중에서도 중국 동쪽에 거주하던 동이 세력을 현재의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세력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미 설명드렸지만, 동이의 오랜 유물과 풍습이 고스란히 한반도로 이주해 온 흔적이 많습니다. 사람은 가만있는데 풍습이나 유물이 저절로 넘어올 수는 없는 것이죠. 제가 갑골문을 공부하면서 의아했던 점이, 갑골문에 표현된 풍습 중 상당수가 현대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고, 한국에는 남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배울 學(학), 가르칠 敎(교) 등의 글자에 들어가 있는 ‘효(爻)’ 자입니다. 효는 나뭇가지 네 개로 점을 치던 풍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글자입니다. 이 점치는 풍습이 오늘날 한국에서 윷놀이 형태로 남아 있지만, 중국에서는 이런 풍습이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가 은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민족이라면, 은을 우리 역사라고 하면 안 되는지요.
 
  “제가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만주에 있던 부여는 과연 우리 역사일까요? 중국 역사일까요? 물론 부여를 구성한 민족은 우리 동이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와 풍습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여를 이어 중국 북방에 등장한 동이족들이 4세기 이후 중원 문명의 지도자로서 중원을 1000년 이상 지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현재의 중국인들도 충분히 부여를 이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고대사를 무조건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라고 나눌 수는 없다고 봅니다.”
 
 
  위대했던 과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
 
  —그래도 어느 문명이나 민족의 주류(主流)를 이었다면 충분히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도 중국에 사는 수많은 조선족이 인종은 비록 한국인이고 언어도 우리와 같지만, 정체성과 동질성을 잃어가고 있잖아요. 현재도 이런데 고대 세계에서 이것은 한국 역사, 저것은 중국 역사, 또 저것은 일본 역사 이렇게 딱 구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도 결국 중원에서 밀려와 한반도에 살면서 우리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다가 이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자신들의 기원을 상나라(은나라)라고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사는 “다만 당시 존재한 나라의 풍습이 한국과 같았는지 중국과 같았는지를 보는 것이 그 나라를 현재 어느 나라가 계승하고 있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풍습은 당시의 중국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옛 영토에 살면서 고구려와 풍습, 인종이 유사했던 선비, 거란, 몽고, 여진 등 많은 북방 민족이 중국을 오랫동안 지배하다 동화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중국은 수많은 민족의 용광로이기 때문에 풍습이나 인종으로 고대사의 정통성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와 갈등을 빚는 원인입니다.”
 
  —그래도 자기 역사의 원류를 알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세우는 건 중요한 문제 아닌가요.
 
  “그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누구보다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 역사의 원류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는 그동안 중국의 변국(邊國)의 역사로 인식되어 세계 역사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과 중앙아시아, 심지어 유럽, 아메리카에까지 관련이 있을 정도로 광대했습니다. 저는 단언컨대 한반도가 이들 광대한 동이 문명의 결집체라고 봅니다.”
 
  이 교사는 마지막으로 “제가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의 위대성을 강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보다 열린 시각을 갖고 주변국을 이해하며 좀 더 서로 가까워지자는 데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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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한국사 1편


| 서문 |

I. 동이의 줄기

 
1. 초기 동북아 역사 대간(大幹)

 
→동북아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토기
→8,000년 전 문명 교류 - 한국에서 핀란드까지

→중국 대륙과 한반도
→중국 문명의 선구자 동이
→용산 문명의 주인공 치우

→중국의 혼란과 고인돌
→복희와 하문명의 형성
→중원에서 동이 문명을 꽃피운 상나라

→중원에서 동이를 몰아낸 화하족
→상나라 유민, 조상들의 땅 조선으로
→상나라와 부여, 고구려
 
 
2. 동이 문명의 이동

→요서에 등장한 유민, 중국에 남은 동이(구이)
→동아시아 문명의 요람, 요서
→두 문명의 공존
→고조선과 상나라의 대결

→고조선, 동이 문명의 충격에 빠지다
→기자조선에 밀린 단군조선
→요하를 기준으로 분단된 고조선
→서쪽 조선(기자조선)의 동쪽 조선(단군조선) 진입

→한반도에 들어온 북방식 청동검
→유물로 본 민족의 이동
→다양한 문화가 섞인 한국 문화


3. 요서에서 요동, 한반도로

→동아시아 최초의 철기 문명
→중국과의 갈등이 있던 BC 4세기
→요서 문명, 한반도와 요동으로 이주
 

4. 한반도에 퍼진 동이 문화

 
→한반도로 쫓겨 온 ‘조선’
→조선에 밀린 ‘마한’
→조선과 한나라 군현에 적대적이던 마한

→고구려에 호의적이던 마한
→마한 땅에 들어선 기자조선
→일본 땅으로 쫓겨 간 남부 한반도인

→폐허가 된 문명의 요람, 요서
→기자조선, 한반도 이주 후 중국을 견제하다
→1,000년 왕국 기자조선, 한반도에서 멸망

→위만조선의 한반도 통일
→한반도로 모여든 고조선 후예들
→북쪽은 예맥, 남쪽은 한예
 

5. 요동에 퍼진 동이 문화

 
→동이(맥) 민족의 요동 진출
→부여의 등장과 예맥조선의 탄생
→요서에서 이주해 온 부여의 새로운 지배자들

→부여 국호의 탄생
→부여와 고구려 건국자들의 고향 ‘고리’
→고구려의 고향 상나라 고죽국

→예맥과 만이(蠻夷)의 연합국 고구려
→부여의 한국사에서의 위치
 

II. 동이의 특징

1. 해를 숭배한 문명인 ‘구리’
치우의 나라 ‘구려(구이, 구리)’의 의미
구려(구리)와 고구려(고구리)
구려(구리)의 바른 의미
‘태양의 사람’을 뜻하는 ‘이’
 

2. ‘해’에서 시작된 한국 고대국가들의 국호

→‘부여’는 ‘해’
→밝은 해 ‘백제’
→새와 태양의 나라 - ‘신라’

→가야, 한, 낙랑은 모두 ‘태양’
→태양이 떠오르는 나라,  ‘왜’, ‘물길’, ‘옥저’
→세상의 아침 ‘조선’
 

3. 고대 동이 민족의 특징

 
→동이 사람들의 독특한 ‘예절’
→머리를 납작하게 만드는 풍습

→중국 최초로 악기를 발명한 민족
→거북점과 뼈 점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들

→고인돌 장묘 풍습
→순장 풍습
 

4. 동이와 화하의 유전적, 언어적 차이

 
     →동이 문명과 한국
     →동북아 사람들의 유전적 특징
     →동이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
     →동이 사람들의 언어적 유사성
 

III. 갑골문과 한국 동이 문화
 
1. 해의 사람 ‘이(夷)’
2. 의(衣)
3. 곡옥(曲玉)
4. 고대 욕조(浴槽)
5. 윷놀이
6. 기타

| 결어 |


동이 한국사 2편

 
| 서문 |

I. 신라의 성립과 발전

1. 신라에 유입된 진한 유민과 진(秦) 유민
2. 신라에 유입된 ‘낙랑’ 사람들
3. 고구려에서 도망 온 ‘석탈해’
4. 석씨의 세력 확장과 김씨의 등장
5. 흉노계 ‘김알지’ 세력의 신라 유입 과정

6. 한반도 왜는
7. 신라를 정복한 왜(부여, 예)
8. 석탈해를 시조로 삼은 왜(동예)인 벌휴왕
9. 신라 석씨의 기반인 ‘부여 정권’의 쇠락
10. 신라를 장악한 ‘김알지(김일제)’ 후손들

11. 왜(동부여, 동예)의 부활
12. 낙랑국의 멸망과 새롭게 태어난 ‘신라’
13. 한반도 ‘왜’ 연맹과 김씨 왕의 출현

14. 동아시아 고대 역사의 주인공 선비족
15. 선비 문화의 유입

16. ‘한반도 왜’의 후퇴
17. 고구려와 왜(부여)의 한반도 전쟁
18. 중국에 한반도 지배 승인을 요구한 ‘왜(일본)’

19. 신라를 장악한 이리떼 선비족
20. 황룡의 나라가 된 신라
 
     →금성에 나타난 용
     →선비식 수도 구획과 고구려 대비
     →선비계 관리명 등장

     →신라의 원수 ‘왜’의 화해와 ‘모씨’왕의 등장
     →새로운 시조묘 ‘신궁’ 건립
     →백제 ‘모씨 왕’과 사돈관계를 맺는 신라

      →노란 안개와 용의 출현 - 황룡국 세력의 정권 장악
     →국호와 왕호의 변경
     →중국식 이름 사용

     →시조묘 대신 신궁에 제사
     →‘개국(새로운 국가의 시작)’ 연호 사용
    → ‘황룡’의 등장

21. 중국 선비족 왕조와 긴밀했던 신라
 

II.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맥계 세력의 부여 정복
2. 고구려현을 정복한 주몽 세력
3. 고구려의 원수 한나라
4. 새로운 고구려, 위나라와의 대결

5. 1,000년의 지배자 ‘선비족’
6. 고구려와 주변 국가들의 갈등
     →고구려의 한(漢)군현 세력 축출
     고구려와 백제(북부여) 세력의 대결
     고구려와 모용 선비의 대결

7. 북연과 동족의 우애를 나눈 고구려
8. 북연의 투항으로 더욱 강해진 고구려
9. 고구려의 선비족(북연) 탄압

10. 고구려와 선비 연맹(백제, 신라)의 전쟁
11. 중원에 진출한 백제와 고구려

12. 선비 백제에 의한 타격
13. 선비계 모씨 연합과의 사투

14.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15. 구이(九夷)의 나라 당(唐)
 
 
III. 백제의 성립과 발전

1. 마한의 소국 백제(伯濟)
2. 백제가 마한에 의지한 이유
3. 백제에 유입된 낙랑인들
4. 백제의 두 번째 기원지 대방군

5. 한(漢) 문명을 이은 백제(伯濟)
6. 대방 백제의 시조 구이왕
7. 대방과 말갈의 백제 주도권 싸움
8. 왜(말갈, 예)의 한반도 장악

9. 낙랑과 대방의 백제 유입
10. 왜 백제(伯濟)를 정복한 부여 백제(百濟)
11. 백제의 본토 회복 노력 - 요서 진출
12. 일본 부여(왜)와 고구려의 전쟁

13. 선비인들의 백제 정권 장악
     선비계 왕조 ‘북연’의 고구려 투항
     ‘여’씨에서 ‘모’씨로 바뀐 백제왕들
     백제와 중국 남조 송과의 관계
     백제 선비계 장군의 왜 정권 장악
     백제와 부여의 결별

14. 중국을 정복한 백제
15. 백제가 중국을 공격할 수 있던 배경
16. 중국 백제의 지속 기간
17. ‘중국 백제’와 관련된 기록들

18. 국경을 초월한 해양제국 백제
19. 백제를 ‘본국’으로 여겼던 일본

| 결어 |
 
 
중원문명의 창시자인 동이(東夷)와 한국과의 관계,
한반도 왜의 실체, 백제의 중원 점령 배경 등,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국 고대사의 많은 미스터리
실증 자료와 논리를 토대로 명쾌하게 풀어 낸 책!


이 책의 저자 이기훈은 중국어 전공자로서 고대 한자인 갑골문을 연구하던 중 한국 문화와 갑골문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현대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갑골문 속 문화현상을 오히려 한국에서 쉽게 찾곤 했는데, 이러한 뜻밖의 사실은 저자가 한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저자는 연구 끝에 우선 그러한 사실을 반영해 갑골문의 기원을 설명한 책을 쓰기도 하고, 중국 북경어언대학교(北京語言大學)에서 한자와 한국 문명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기도 한다. 저자가 중국의 대학에 제출한 논문에는 한국의 전통 놀이인 윷놀이가 한자 ‘學(배울 학)’자, ‘敎(가르칠 교)’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주장 등, 기존의 상식을 뛰어 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북경대 사학과 출신 지도교수(程龍 교수)의 정치를 떠난 과감한 지지에 힘을 얻어 논문을 쓰면서, 동북아시아 고대사에 관심을 기울여 중국 역대 정사인 24사의 동이전을 번역하고 한국 측 사서와 비교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 한국의 고대 역사에 많은 비밀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를 풀기 위해 당시 시대 상황과 유물, 국내외 논문을 다수 참고해 고대사를 새롭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결국 저자는 한국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심의 ‘국가사(國家史)’가 아닌 한국인의 근간이자, 고대 중원 문명의 창시국인 상나라(은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예족’과 ‘맥족’이 만들어 간 역사, 곧 ‘동이 역사’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해 내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한국의 고대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처음 이 책의 출간을 의뢰받았을 때 가장 흥미를 끌었던 점은 저자가 중국의 유수 대학인 북경어언대학교에서 고대 한자(갑골문)와 한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주제로 논문을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한국 재야 사학계 일각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일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구체적 실증이나 학계의 인정 없이 이루어지고 있어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한자와 한국과의 관계를 증명하고 또한 그 원인을 파헤쳐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한 것이 일견 대단해 보였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분들은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당돌한 주장’에 당황하여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그동안 품었던 한국 고대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을 실증 자료들과 논리로 당당히 펼쳐 나가는 저자의 필치에 박수를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독자들의 반응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한편으로는 한국 측 사서들의 ‘사실 엄폐’ 내지 ‘사건 암시’를 신랄하게 파헤쳐 그 동안 한국인들이 알고 있던 역사적 지식들을 송두리째 바꾸려 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이 한반도 역사를 마치 ‘중국의 아류사’ 쯤으로 여기는 오만을 불식시키고자 노력한 흔적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이 책은 어찌 보면 아군 없는 외톨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강단 사학자들이 정해 놓은 역사의 틀과 배치되고,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도 배치되며,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어느 나라 학자도 쉽게 이 책의 내용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저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많은 ‘아군’이 생긴다면 이 책의 가치는 과거 어떤 역사서보다 의미 있는 역사서가 될 것이다.
저자는 서언에서 밝혔듯 역사를 통해 동북아시아 3국(한중일) 간에 일고 있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 삼국이 공동의 운명을 지닌 역사 공동체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입장에서만도 아니고 중국, 일본의 입장에서도 아닌,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향후 삼국 국민 간의 서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와 보다 열린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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