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믿고, 알게되면 못 믿는다.

성(聖賢)현님들의 가르침 말고, 종교는 구라고 사기다.

▪︎진리(Truth),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유함'이고, '복'이다.

나린푸실 이야기/여행 이야기

[학술탐방 저널(그리이스-이탈리아)]

Narin Pusil 2021. 10. 31. 21:24


[학술탐방 저널(그리이스-이탈리아)]



1. 학술탐사를 위한 여정중에 시드니-인천-이스탄불까지 하루 24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보냈다.

인천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뺀 시간이지만 너무 지루했다.

이스탄불에서 도착해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번 여정에서도 느끼는 것은 타국에서 식사를 할때마다

인천공항 근처 호텔에의 식사 때문에 그 후에 제공되는 타국의 음식들이 혀끝에 울림이 없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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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묵고 있던 지역이 sea of marmara라는 대리석 광산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왔고

바울 당시 로마 *클라디우스 황제의 비시디아-안디옥의 인구는 100(10?)만으로 로마의 인구와 비슷하였고

클라디우스-더베(Thebe)라 명명한그곳도 대리석 광산으로 번창하였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기원전 10년 8월 1일 - 54년 10월 13일)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칼리굴라 황제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43년,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 내 로마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을 보호하고 브리타니아 내 광물, 목재, 가축 등을 획득하며 노예를 확보할 목적으로, 친로마파 브리타니아인들의 개입 요청,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를 위협하던 드루이드교(드루이드는 고대 영국의 켈트 신앙의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멀린과 같은 사제를 말한다.)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에게 5만 명의 로마군 지휘를 맡겨 대대적인 브리타니아 전쟁을 시작했다.  45년에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하였다.  (사도행전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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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터키 국경도시 입살라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스를 갈아타고

그리이스 북부 땅으로 달려가는 양쪽은 올리브 나무 숲도 안 보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사는 황량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지역은 지금도 회교(이슬람)를 믿는

터키계통의 그리이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한때 서구와 패권을 가늠하던

오스만 투르크가 세계대전으로 무너지고 그리이스가 독립했어도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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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울은 배로 드로아를 떠나 도착한 로마에서 이주한 로마인 상류층이 만든

빌립보의 외곽 항구인 마케도니아 네압볼리(new polis, new city

= 터키 지배하에서는 카발라kabala로 불리웠고, 로마의 나폴리를 상기 시킨다)에 도착했다.

로마인 상류층의 휴양도시인 그곳은 다문화 다종교를 수용하는 종교문화가 성행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바울일행이 전도활동을 하지못해 유럽땅 첫번째로 하지않고

다음에 방문할 루디아의 빌립보(Philippi)가 어떤 신학자들에 의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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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시 버스를 타고 빌립보에 내렸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와 부르타스(카시우스)간에 치열했던 빌립보 전쟁이 끝난후에

로마는 대규모의 병력을 그 지역에 주둔 시켰다.

그래서 자연히 빌립보는 퇴역군인의 은퇴지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거기에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 군단에 가담했던 빌립보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6.  그리하여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과 훗날 클라디우스 황제때 추방된 유대인들이

그들의 비즈니스를 위해 고린도는 물론이고 빌립보로 몰려들였다.

많은 유대인들 중에 바울은 염색가공업을 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

여자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게되는데

남자로서의 특권인 율법적 할례가 세례로 대체되는 사건으로

당시 헬레니즘의 시대조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의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루디아의 큰 도움을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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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빌립보 교회터나 시장등의 공공건물의 바실리카 양식은

고대로마의 지붕이 덮힌 건물들의 건축양식으로 그리스도교 특히 정교회에서는

총대주교와 사면권까지도 관련을 갖고 있는 국제적인 예배중심지 역할을 하는

교회에 바실리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후레스코 양식은 훗날 후레쉬라는 영어의 의미와 같이 신선하고 깨끗함이 다가오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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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데살로니카 가는 도중에 마케도니아 트라키 주 산위의 마을,

드라마Drama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생은 하나의 드라마’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그속에 담겨있는 인간들의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어 죽는

인간의 생노병사와 짧은 기쁨속에 살기도 하지만

슬픔에 젖어 있을때도 쓰리고 아픈 인생속에서도 짧은 즐거움도 찾아 온다는

인간의 희비애락을 말해주는 것이 드라마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이번 학술탐사 여행도 나의 우리의 인생이란 드라마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9.  아볼로니아 암비볼리를 거쳐 데살로니카에 도착했다.

바다속까지 대리석이였던 당시 데살로니카는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의 이름을 딴 도시로 마케도니아의 수도였고

100(10?)만의 로마와 같은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1차 여행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유대교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배신자와 같은 치욕적인 소리와 함께 폭력을 피해 베레아(Berea)로 내려간다.

베레아에서 바울이 환영 받았던 까닭은 다민족이 살고있던 다른 도시와 달리

모든 문물을 수용하던 순수한 헬라인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두로와 시돈의 페니키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환영 받았던 것처럼….

 


10.  베레아를 떠나 로마신들이 즐비했던 현 그리이스의 수도 아테네로 들어 섭니다.

로마가 그리이스를 지배할 당시 로마의 상류층 자제들은 아테네 아카데미로 유학을 와서

2~4년 동안 헬라교육을 받고 돌아 갔다.

이것이 로마에 의한 그리이스 철학은 물론 교육 문화등이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당시 헬라 최고의 엘리트들인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이

아레오바고 법정까지 그를 끌고가 하나님이 신전에 계시냐 아니냐를 놓고 격론을 벌였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유일함을 변증하기에는 그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11.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공급하시는 부족함이 없는 그 분은 어떤 그리이스 시인의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시어대로 ‘그분은 그분의 자녀를 만나 주신다’라는 내용과 함께

‘하나님이 정하신 한분을 통해 세상을 의롭게 심판 하신다’라는 말로 바울은 변증을 마쳤는데,

그리이스 신들 역시 구약의 하나님처럼 현상이나 사물로 나타나거나(아바타),

혹은 인간세계로 직접 내려와 특정인을 만나 계시를 주는 

즉, 신이 직접 인간세계에 내려와 현현(顯現)한다는 구약시대와도 같은 헬라철학에 대하여

일단 승천한 예수 하나님은 내려오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서로의 영을 통하여

교감하는 신으로써의 팔레스타인의 신(新)사고와의 충돌이었다.

 


12.  신임 아가야 총독 갈리오도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했듯이

당대의 석학들이라 말할 수 있는 바울이나 유대율법학자들

그리고 헬라철학자들이 흉악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서로의 사고 차이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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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리이스 신들중에 아폴론 신과 신전이 가장 크게 돋보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소피스트 신탁을 받는 신이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일리야스와 오딧세이의 아테네(아덴)을 떠나 국제무역의 도시 고린도에 도착했다.

당시 고린도(Korinthos)는 호사스럽고 문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아가야(Achaia)의 수도였다.

 


14.  아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울은 우상숭배의 중심지 고린도에서

지나온 여정속에 있던 도시들의 지역선교에 고심해야만 했다.

앞서 말한대로 AD45년 유대인과 예수를 따르는 이들과의 싸움으로 일어난 폭동으로 말미암아

로마에서 추방된 유대인 2만여명이 이곳 고린도에 살고 있었다.

그들중에 있던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은 선교자금 뿐만 아니라

장차 복음전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로마로 가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만나

이들에게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바울의 ‘이신칭의’를 사도로써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종말의 시간만을 기다리던 데살로니카 형제들에게

경건한 삶과 함께 일상생활을 충실하게 보내라는 격려의 편지들을 써서 디모데편에 보내기도 했다.

 


15.  그가 갈라디아를 비롯한 여러곳에 보냈던 갈라디아서 5장1절에

무엇이 자유함인지를 알려주는 바울의 사고,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를 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곧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그가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서 그런지 누가는 편지 첫머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theopilus)”라고 적었다.

마치 필라델피아(Φιλαδέλφεια), 그리스어로 필라델포스(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도시가 로마 지역 여기 저기에 있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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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4월 24일 오후에 고린도의 외항 파트라스를 출발하여

말만 들었던 푸른 창공에 빛나는 태양과 잔잔한물결의 아드리아 바다를 항해하여

그 다음날 아침 이탈리아 장화 뒷굽에 있는 바리 항구에 도착하였다.

먼저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당시 있는 그대로 묻힌 폼페이 유적지를 지나

러시아워 정체속에서 말로만 들어왔던 (돌아오라)쏘렌토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런 노래를 듣지 아니해도 나는 그곳으로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둘러있는 도시임을 알게 됬다.

로마로 향했다.


 


17.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가족영묘를 지나 콜로세움( Colosseo)으로 갔다.

사람을 살해 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어마어마한 경품도 주어 로마시민을 바보로 만들기도 했다.

 

크리스쳔을 핍박하던 네로가 시민의 저항에 자살하고

각기 지역총독이였던 3명의 군인황제가 살해되는 AD69년,

유대왕국이 현존하고 있었으나 유대지역 반란사태가 일어나도 진입할 수 없자

이를 평정하러 갔던 그리고 그곳을 아들인 티투스에게 맡기고,

로마 변방항구에 주둔하며 기다리고 있던 베스파시안 장군이 이 저항을 진압하고 황제에 오른다.

 

결국 동족까지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산적들로 변모한 팔레스타인 유대 반란도

아들 티투스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고. 

저항하던 팔레스타인들을 노예로 데려와 그들의 노동력으로 8년만에 완공한 것이 바로 이 콜로세움이다.

 


18. 두오모(Duomo) 성당들은 앞서 빌립보에서 말한 바질리카(게바=돌)신전에서

대주교가 머무는 어마무시한 성당으로 수도원도 함께 있다.

쿼바디스 성당 앞에 비아아피아(Via Appia)를 보았다. 얼마나 멋진 길인가 보다는

그 당시 그런 도로를 돌로 깔려면 얼마나 많은 돌과 인력이 들어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과 베드로가 갇혀있던 마메르틴 구치소(Foro Roromano)나

바울의 참수터Tre Fontane(뜨레 폰타네)등등은 전승적 이야기가 많아 생략한다.

 


[SCD학부 학술탐사 총평]

 


- 1. 4월30일 주일, 인솔하시는천교수님 설교중에 변함 없는 것

하나님의 은혜 사랑 영광 등이라 하였는데, 필자는 크게 2가지로 본다.

 


첫째는 기독교 철학에서 말하는 Arche 본질이라는 개념(=중동의 '신', 동양의 '도')과

둘째는 인간의 하이어라키 라 말할 수 있다.

옛날옛적부터 그들은 그들의 '하이어라키 (hierarchy)' 를 위해 '신의 영광'을 부르짖었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십자가 영광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민중의 맘에 '하나님의 나라'.. 그 평화의 지분을 가지고 살기를 바랬다.

그게 그분의 전부다.



지금의 종교(교회사)라는 것은 그들의 '하이라키'를 쟁취하고 누리기 위한 술수고 잔혹한 역사다.

예수는 그들의 하이라키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고급종교는 제우-스가 자리잡은 신전이라는 곳에 교묘히 지저-스를 신으로 등극시켜

성전으로 교체하여 가두어 놓고 민중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것을 어찌 생각 하는가? ...,
정작 '신이된 인간'은 그들의 퍼펫으로 도용되어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현재의 교회들을 보라! ......

 


사람 하나하나 각자들마다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등 그 어느것 보다도 최 우선으로 삼았더라면 ...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하이라키'를 거뭐지려는 인간들이 정치 종교 사회속에 나타날 수 있을까 ..

설사 나타날 수 있다 하더래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ㅇHierrachy를 느끼게 하는 성당 건물 ;   밀라노-두오모


"The teaching of Jesus must be succeeded, but HE became an idol by someone, 

 and the religion thus made was a 'falsehood' from the beginning."

♤ "예수의 가르침은 계승되어야 하지만 그는 누군가에 의해 우상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교는 처음부터 '구라'다."

 

 


■ Looking at church history and the history of medieval western architecture,

   there was no life for ordinary people. 

   For whom were they built? And who on earth is God for? ...


♤ 교회사와 중세 서양 건축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기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지어 졌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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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가 머문다는 밀라노 두오모 성당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는 없었고 헛된명성과 차별적계급 구조만을 느꼈읍니다.

It is the Duomo of Milan where the Archbishop is staying.

 I felt there was no Jesus but empty fame& hierarchy.